충의 숭모단 (忠義 崇慕壇) 탐방기
▢ 기(基) : 우리 고장 문화유산 찾아보기
구한말 오백년 조선왕조가 그야말로 바람 앞의 등불처럼 망국으로 치닫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오직 일편단심, 애국충절의 의기로 의연하게 일제와 맞서 싸웠던 삼서면 출신 충의사 운석(雲石) 나상호(羅相鎬) 선생의 행적과 숭모단 유래를 재조명하기 위하여
지난 11월 18일, 우리 장성문화원 향토사연구소 서정철 연구원과 삼서면 출신 봉하욱 문화원 이사
그리고 최성복 문화원 사무국장과 함께 우리고장 애국선현들의 충절의 혼이 서려있는
장성군 삼서면 태뫼산 정상에 있는 ‘충의 숭모단 (忠義 崇慕壇)’를 찾아
숙연한 마음으로 거룩한 임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았다.
▢ 승(承) : 충의사 운석 나상호 선생의 행적(行蹟)과 숭모단(崇慕壇) 유래
1905년 11월
을사보호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이곳에 애국유림을 모아 북향 4배 후
일제를 규탄하고 성토하였다.
1908년 4월 9일
의병과 일본군이 접전 의병 46명이 전사하고 화승총 20여정을 빼앗긴
슬펐던 조국수호의 항전지이다.
19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이 되자 지방 애국유림이 모여 주권회복을 외치며 울분을 참지 못하고 땅을 치며 광무황제를 향해 방성대곡하신 곳이다.
1919년 1월 21일
광무황제 고종이 일인에 의해독살 승하하자 이곳에 망곡단을 축단하고
인산(국장)일까지 90일간 삭망일(朔望日)일에 통곡 북향4배로 충성스러운 백성의 도리를 다 하셨다.
1919년 3월
광무황제 고종 인산(국장)일에 운석 나상호 선생께서 지방조문단을 이끌고 상경 친필로 만사하셨고 국장행열의 최선봉에서 만사지를 들었다고 한다.
1919년 3월
기미만세운동 시에는 이곳에 봉화를 올리고 애국유림을 모아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던 곳이다.
1919년 4월
광무황제 숭모단향비 건립기금을 모금하기 위해 지방 애국유림을 방문
일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펴는 한편 조국 주권회복운동을 전개하셨다.
1923년 계해 7월 25일
이곳에 8개의 돌기둥을 세우고 맞배집 기와지붕에 네 개의 풍경을 단비각과 광무황제(고종) 숭모단향비를 세우고 삭망일에 참배하시면서 조선인은 일본 천황에게 절을 하여서는 안 된다고 항일운동을 하시며
매년 음 7월 25일에 향사하셨다.
1926년 병인 4월
융희황제 순종이 승하하자 이곳에 융희황제 숭모단향비를
같은 자리 왼쪽에 세우고 함께 향사 하였다.
1935년 11월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이에 반대하는 한실마을 애국독서회 사건이 일경에 발각되어 한실, 송곡마을 애국청년 6명이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구금되었으며 일제가 숭모단을 철폐하려고 하자 나상호 선생께서는 이곳에 움막을 치고 숭모단을 수호하시다가 수차례 구타 또는 투옥되셨다.
1936년 3월 2일
운석 나상호 선생이 50세를 일기로 타계하시자 유족은 일경을 피해
이 고장을 떠나셨으며 숭모단향 행사는 중단되고 숭모단은 출입이 통제되었음.
1943년 7월
숭모단 비각이 일경에 의해 파괴도자 일경은 벼락을 맞아 부서졌다고
헛소문을 퍼뜨렸고 광무, 융희 양위분의 비석은 땅에 묻혔다.
1945년
해방이 되자 1946년 4월에 애국청년회 대표 나정주씨가 주동이 되어 비만을 찾아 다시 세우고 돌담장을 다시 쌓고 주위를 정비하였다.
1946년 ~ 1960년까지
유족과 군 유림이 협력하여 향사만을 면면히 이어왔다.
1961년
군사혁명으로 향사마저 중단되었고 돌보는 사람 없이 숭모단은
잡초에 묻혀버렸다.
1981년
장성군 유림일동으로 운석 나상호 충의 유적비를 선생의 선영하에 세웠으나 숭모단은 돌보는 사람 없이 잡초에 묻혀가고 있었다.
1995년 2월
인근마을 나봉기, 이현태, 봉남순씨가 조기 등산 중 발견하여 매월 1월 1일과 음 정월 대 보름 날에 인근 주민을 모아 놓고 정성껏 향사하면서 숭모단 비각 복원을 장성군에 건의키로 하였다.
1999년 1월
장성군정 보고 시 김흥식 군수님에게 숭모단 비각 복원을 건의하여
비각복원을 약속 받았다.
2000년 정월
대보름 날 삼서농협 주부덕 조합장의 발의로 이곳에서 풍년기원제가
올려지기 시작했다.
2001년 11월
숭모단 복원 추진위원회가 발족되었으며 위원장에 나봉기씨가 추대되었다.
2002년 1월 1일
새해 해맞이 행사가 나근채 면장 발의로 시작되면서 면민의 관심 속에
자리 잡아 가고 있었다.
2001년
장성군 예산에 숭모단 비각복원 사업비 3,000만원이 계정되었다.
2002년 11월
숭모단 비각이 복원 준공되었으며 사업비 2,800만원이 투입되었고
장성군에서 발주하고 (주)화성건설에서 시공하였다.
숭모단 복원 기념사업으로 충의 숭모단 복원비와 동참하신 분의 헌성비
기원제단, 추모제단, 그리고 숭모단 주위 환경정비, 진일로 등반길 정비 등에 14,350,000원이 투입되었다.
2002년 12월 31일
숭모단 복원사업에 286명이 동참하였으며 1,876만원이 헌성금이
답지되었다.
2003년 3월
숭모단 비각복원 준공식과 아울러 충의 숭모단 복원비 제막식을 거행했다.
▢ 전(轉) : 충의 숭모단 복원비
이상 숭모단에 얽힌 유래를 살펴보았고 매년 삼서면사무소 주관으로
새해(1월 1일) 해맞이 행사, 삼서농협 주관으로 음력 대보름날 풍년기원제 그리고 삼서발전협의회 주관으로 애국지사 추모제를 실시하는 등 면민화합의 구심점으로 발돋움하고 있으며 여기서 미래세대에 충절의 귀감인 충의 숭모단 복원비문을 살펴보기로 한다.
충의 숭모단 복원비문
忠義公 雲石 羅相縞선생은 乙巳名賢이신 松齊 羅世纘선생의 14대손으로
1887년 丁亥 5월 22일 한실마을에서 출생하여 艮齊田 선생 문하에서 강학하시고 19세 때부터 여생을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일제에 항거하시다 돌아가셨다.
1905년 11월 을사보호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통분을 참지 못하고 땅을 치며 통곡하신 곳이며 1908년에는 의병과 일본군이 싸웠던 조국 수호의 항전지이다.
지금도 옛 성터의 흔적이 남아 역사적으로도 유서 깊은 곳은 틀림없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이 되자 자주독립을 외치며 동지들을 규합하여 일제를 규탄하였고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승하하자 이곳에 망곡단을 만들어 초하루 보름날에 통곡 북향 4배로 백성 된 도리를 잊지 않으셨다.
己未만세 운동 시에는 이곳에서 봉화를 올리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곳이며 고종황제 국장 시에는 선생께서 조문단을 이끌고 상경하여 친필로 만사하시고 귀향하신 후 삼남 일대 애국 유림을 방문 조국의 국권회복과 자주독립을 주창하시면서 일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펴는 한편 光武皇帝崇慕壇享碑 건립기금을 모아 1923년 癸亥 7월 25일 여덟 개의 돌기둥을 세우고 3간 맞배집 기와지붕에 풍경을 단 비각과 비를 세우셨다.
그때 이 운동에 협력하신 애국 유림은 금성 羅希文 羅虞淳 羅允中 羅相喆 羅承奎 羅聖瑞 羅鍾熙 장흥 高鳳鎭 경주 金烈 상산 金英基 金善基 광산 金洪彬 김해 金貴炳 진주 金奇採 金起澤 교하 盧德表 문화 柳在暎 수원 白南柱 하음 奉洛淳 영월 辛克連 청송 沈相河 해주 吳成煥 함평 李奎憲 李鐘澤 李鐘湜 경주 李德雨 광주 李錫奎 전주 李會文 장흥 林亨洙 나주 林廷奎 진주 鄭興黙 하동 鄭仁采 영성 鄭炳萬 철원 周東弼 경주 崔萬瑞 청주 韓百勳씨 등이 전해지고 있다.
1926년 순종이 승하하자 丙寅 4月 25日 隆熙皇帝崇慕壇享碑를 세웠으며 매년 음력 7월 25일에 향사하였다. 1935년 실독서회사건이 발각되어 羅承奎 羅相玉 李相基 羅永燮 羅學烈 任台植 씨 등이 투옥되면서 숭모단 철페와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선생께서는 숭모단 수호를 위해 이곳에 움막을 짓고 상주하시면서 일경에 항거하시다가 투옥되셨으며 1936년 丙子 3월 2일 50세의 일기로 조국광복을 보지 못하시고 한 많은 생을 마치셨다.
선생이 타계하시자 일제는 비각을 무너뜨리고 비는 땅에 묻었는데 1945년 해방이 되자 애국청년 羅鼎柱씨가 주동이 되어 돌담장을 다시 쌓고 숭모비를 찾아 다시 세워놓았으며 유족 羅纘柱씨와 뜻있는 국내 유림이 모여 향사하여 오다가 1961년 군사혁명으로 중단되었다.
1971년 장성군 유림 金源萬 邊殷淵 奇宇大 羅鉀柱 羅琯柱 羅南柱 林甲洙 鄭豊基씨가 발기하여 雲石 羅相鎬忠義遺跡碑를 군 유림일동으로 세웠으나 충절의 혼이 서린 숭모단을 돌보는 이 없어 잡초에 묻혀 있었는데 1995년 羅鳳基 李鉉泰 奉南淳씨가 주위를 정화하고 매년 정월 대 보름날에 정성껏 향사하니 농업현동조합에서 풍년 기원제가 올려지고 새해 아침 면민 해맞이 행사가 시작되면서 전 면민의 관심 속에 숭모단 복원을 장성군에 건의하여 복원을 보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잊혀져가는 귀중한 문화유산을 발굴하여 보존함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큰 사명이자 책무라고 생각되며 민족의 수난기에 불굴의 희생정신으로 애국충절에 혼을 담아 세워놓은 숭모단이 전국에서 유일하게 우리고장에만 세워졌으니 대대로 충절의 고장임을 말해주고 있어 큰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이 비는 雲石 羅선생을 비롯한 애국 유림과 순국선열을 추모하고 숭고한 애국정신을 자손만대까지 계승시켜 훌륭한 인재를 육성 배출시키고자 함이니 집집마다 충효례 정신을 숭상하는 살기 좋은 고장으로 발전시키는데 구심점이 되었으면 한다.
지금까지 숭모단 복원사업에 특히 관심을 경주하여 주신 장성군수님과 복원사업에 동참하여 주신 면민여러분의 거룩하신 뜻을 후세에 전하고자 숭모단비각 복원에 즈음하여 전 면민의 이름으로 삼가 돌을 깎아 세우노라,
서기 2003년 2월 일
전 삼서면장 松谷 羅鳳基 짓고
장성문화원장 碧松 李相鏞 쓰고
삼서면민 일동이 세움
▢ 결(結) : 역사의 교훈과 우리의 각오
오늘, 유서 깊은 태뫼산 숭모단에 올라 저 멀리 수양호가 그림처럼 펼쳐진 아름다운 풍광을 내려다보며 그 옛날 이곳에서 땅을 치며 통곡하고 하늘을 우러러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망국(亡國)의 한(恨)을 달래며 짐승보다 못한 야만의 시대를 견뎌야했던 힘없는 나라와 백성들의 처절한 몸부림을 생각하노라니 만감이 교차하며 숙연한 마음 속, 불편한 비극의 역사를 복기하며 오늘 날 세계 속에 우뚝 선 위대한 대한민국의 창창한 미래를 향한 대약진에 동참할 진저!
❀ 불편한 비극의 역사 다시보기
때는 바야흐로 오백년 조선왕조에 망국의 먹구름이 휘몰아치던
1895년 을미년 10월 8일 새벽 경복궁!
그곳에서 조선침략의 최대 걸림돌인 대한제국 광무황제의 비 명성황후 살해를 위한 일본의 비밀작전 ‘여우사냥’이 있었으니
바로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를 시해한 천인공노할 을미사변이었고 이 사건이후 결국 대한제국은 패망하고 말았으니 아, 시일야방성대곡이라!
여기에 당시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가담한 일본인 이시즈카 에조라는 사람이 시해 과정을 아주 정밀하게 묘사한 편지 형식의 비공식 비밀보고서인 에조 보고서가 사건 발생 71년만인 1966년 일본의 역사학자 야마베 겐타로에 의해 일부만 최초로 발표되었다가 최근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저자 김진명 작가가 이 문서를 찾아내어 전문이 세상에 밝혀지게 되었는바 전문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에조 보고서
“먼저 낭인들이 20명 정도 궁에 쳐들어와서 고종을 무릎 꿇게 만들고 이를 말리는 세자의 상투를 잡아 올려서 벽에다 던져 버리고 발로 짓밟았다. 그리곤 명성황후를 발견하자 옆구리 두 쪽과 배에 칼을 꽂은 후 시녀들의 가슴을 다 도려내고 명성황후의 아랫도리를 벗겨 돌아가면서 20명이 강간했다.
살아있을 때도 하고, 한 6명 째에 죽어 있었는데도 계속 "시간"했다.
시체에 하는 것을 "시간"이고, 살아있을 때 하는 것을 "윤간"인데
명성황후를 "시간과 윤간"을 다했다.
그리고 그것을 뜯어 말리는 충신의 사지를 다 잘라버렸다. 그렇게 한 후
너덜너덜해진 명성황후의 시체를 얼굴부터 발끝까지 차례대로 한 명씩 칼로 쑤셨다. 죽은 후에도 여자로서 가슴도 도려지는 큰 수치를 당했다.
그것을 길거리 사람들이 다 보고 있는 데서 시행했다.
그 다음에 명성황후 시체에 기름을 붓고 불로 활활 태웠다.
이것이 을미사변의 전모를 담은 에조 보고서 전문이다.
이에 김진명 작가는 역사를 바로잡고자 피나는 노력으로 왜곡 날조된 역사를 만천하에 밝혔지만 일본과 정부는 말이 없고 국민은 무관심하고
잊고만 사는 것이 너무나도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난다고 했다.
이 얼마나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통한의 역사인가!
진정 한국인이라면 참혹하게 죽어간 국모 명성황후의 원혼을 풀어줘야 할 책무가 있을 터!
나라는 국민을 지킬 힘이 없었고 국민 또한 황제와 황후를 지킬 힘과 의지가 없었음이니 당시 최첨예 부대인 황궁수비대 300여명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작 일본 암살단 20명을 처치하지 않고 도망가 버렸다니
그것은 조선왕조 500년 동안 성리학의 탁상공론과 지배층의 가문과 권세와 명예와 부귀영화만을 위하여 중상모략으로 서로 죽이고 죽는 사색당쟁으로 백성을 착취하여 고통과 원한을 쌓았기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이제 우리는 지난날의 잘못과 못남을 깨닫고 참회하고 반성하고 성찰해야 하느니 오직 투철한 역사관과 자부심으로 온 국민이 대동단결하여
미래를 위하여 용서는 하되 결코 잊어서는 안 될 비극을 교훈삼아
철통같은 국방력과 애국애족의 굳센 신념으로 단군 이래 가장 위대한 대
한민국의 힘을 세계만방에 떨쳐 일어서야 하리라.
오늘 충의공 운석 나상호 선생 등 애국충절의 혼이 서린 이곳 삼서면 태뫼산 충의 숭모단에 올라 다시 한 번 임들의 거룩한 애국정신에 경의를 표하며 비문에 새겨진 ‘영생의 지혜’를 가슴에 새겨본다.
영생의 지혜
우리 인간은 이 땅의 기나긴 역사 속에 짧은 한 시대만을
살다가 빈손으로 떠나갑니다.
그러나 살았을 때 부끄럽지 않게 그 흔적을 남기고 가는 것은
자손만대에 귀감이 되는 훌륭한 일입니다.
귀하는 이와 같이 내 고장의 귀중한 문화유산을 발굴하여
복원하고 보존하고자 하는데 자랑스럽게 이름을 남기셨으니
이것은 곧 당신의 새 역사를 창조하는 것이요
역사는 영원불멸하니 바로 이것이 영생하시는 것입니다.
서기 2003년 2월 20일
숭모단복원사업추진위원장
송곡 나봉기
주) 본 내용은 유튜브 방송 <황룡강 소천 tv)에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