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청년의 6.25전쟁!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북한군 암호명 ‘폭풍 224’라는
작전계획에 따라 1953년 7월 17일 휴전협정까지 3년 1개월에 걸친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同族相殘)의 6 ‧ 25 한국전쟁!
그러나 2021년 현재도 휴전상태 일 뿐 아직도 끝나지 않은
한국전쟁 71주년인 지난 6월 25일에
전(前) 장성읍장을 역임한 오동길 후배가 필자에게 보내 준 카톡을 보니
그것은 ‘태극기 휘날리며’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가슴 뭉클한 논픽션 감동 실화 스토리이기에
그 전문(全文)을 소세사이 가족 여러분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주) 사진: 사진 중앙의 좌측에 '하사 오순종'의
위패가 보입니다. 그곳에 계시는 수많은 호국영령들 대부분이
십대 후반, 이십대 초반의 꽃다운 청춘들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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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청년의 6.25전쟁!
1950. 6.25 아침 전남 광주에 있는 군부대에는 비상이 걸린다.
군인들을 트럭에 태우고 서울방향으로 내달린다. 저녁 무렵 서울의 북쪽 미아리 부근에 도착한다.
군인들은 참호를 파고 북쪽을 향해 총을 겨누고 어둠을 응시한다.
멀리서 들려오던 포성은 차츰 가까워지고 포탄이 비 오듯 떨어진다.
깊은 참호는 파괴되고 무너져 엎드려도 몸을 숨길 수 없다.
살아남은 군인들은 서로 손짓 발짓으로 신호하면서 후퇴한다.
흩어져서 서울시가지를 지나 한강에 도착하니
이미 한강철교는 폭파되어 건널 수 없다. 군인들이 강변을 따라 조심스레 가다보니 다행히 조그만 거룻배가 있어 타고 남쪽을 향해 노를 젓는다.
인민군들이 멀리서 보고 뛰어와서 거룻배를 향해 총을 쏘기 시작한다.
겨우 한강 남쪽에 도착한 군인들은 남쪽으로 걸음을 재촉한다.
이번에는 미군전투기들이 인민군으로 오인하고 기총소사를 퍼붓는다.
군인들은 남쪽으로 내려오다 국군부대를 만나 합류하고 부대에 재편성되어
인민군과의 본격적인 전투를 해나간다.
청년이 어머니에게 들려준 6.25전쟁 이야기는 국군이 북진을 하면서부터 계속된다.
미군의 지원으로 새로운 군복, 철모, 소총 등 무장을 하고 사기도 드높게
북진을 한다. 서울을 수복하고 38선을 넘어서 북녘 땅에 들어선다.
전진하다 후퇴하고 다시 전진하는 치열한 공방전이 이어지던 가운데
청년이 속한 국군부대가 적진에 고립된다.
인민군에게 포위된 군인들은 사력을 다해 싸우고 치열한 백병전에서
청년은 등을 대검으로 찔리고 오른쪽 눈알이 파열되어 과다출혈로 의식불명이 된다.
얼마 후 진격해 들어온 군인들에 의해 국군병원으로 후송된다.
국군병원에서 보름 만에 가까스로 의식이 돌아왔다고 한다.
국군병원과 육군본부에서는 청년을 명예제대 시킨다.
청년은 제대하여 고향집으로 돌아온다.
온 몸이 허수아비 같은 상이군인의 상처뿐인 귀향이다.
조금만 건드려도 부셔져버릴 것 같은 몸으로 누워 있는
아들을 살리려고 어머니는 정성을 다한다.
얼마 후 걸어 다닐 정도가 되니 같은 처지의
전우들과 만나는 모임 등에 참석하기 위해 장성읍까지 가끔 다녀오고 한다.
당시는 비포장도로에 버스도 없던 시절이다.
청년은 덜컹거리는 트럭 짐칸에서 겨울 찬바람을 맞고 다녀오다
감기에 걸려 않다 재대한 다음해에 숨을 거둔다. 청년은 고향땅에 묻히기는 했으나
결혼하지 않은 미혼이라 어느 누구도 돌보지 않고 찾지 않는 잊혀진 존재가 된다.
청년의 어머니에게는 아들 둘이 있다.
작은 아들은 전쟁에 나갔다 부상당해서 죽고 큰아들은 북하면사무소 공무원으로 근무한다.
큰아들이 결혼해서 아들을 낳자 웃음을 다시 찾은 어머니는
작은 아들에 이어 큰아들의 죽음을 마주한다.
큰아들은 병으로 않다가 삼십대 초반에 세상을 떠났다.
네 살배기 아들을 어머니에게 남기고 떠난 것이다.
할머니가 된 청년의 어머니는 어린 손자를 키우며
가끔 일제시대 어렵게 살아온 이야기, 6.25전쟁의 참혹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깊은 한숨과 함께 할머니는 작은아들인 청년의 6.25전쟁 이야기도 들려준다.
손자는 어린 시절 할머니가 가끔 들려주는 이야기로
겪어보지 않은 6.25전쟁을 실감하고 가슴 깊은 아픔도 어렴풋이 느낀다.
할머니가 조그만 논에 농사지으며 손자 키우며 살아가니 가난하고 고단한 생활이었다.
아들을 국가에 바친 청년의 어머니에게는
국가로부터 어떠한 보상이나 예우도 없었다.
손자인 나는 농고를 졸업하고 공무원으로 근무해오다
세월이 흘러 정년퇴직을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묘소를 새로 조성하고 보니 삼촌 생각이 떠오른다.
어릴 때부터 마음 한구석에 있던
얼굴도 모르는 삼촌이 묘소도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겁다.
혼령이나마 자신이 몸 바친 조국을 자랑스러워하고 떳떳하게 느낄 수 있게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국립현충원 봉안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육군본부에 병적과 전상기록을 확인하여 국가유공자 결정을 받았다.
이어서 광주보훈병원에서 서면신체검사를 거쳐 전상등급 판정을 받아
국립현충원에 묘지를 조성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 돌보지 않아 안타깝게 묘지와 유골을 찾을 수 없었다.
묘지는 조성하지 못하였지만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위패를 봉안해주었다.
지난 5월말에 위패를 봉안하고 제66회 현충일에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삼촌의 위패를 마주하고 인사드렸다.
돌아가신지 70여년이 지나 너무 늦었지만 위패를 봉안하여준 국가에 감사한 마음이다.
이제 혼령이나마 전우들과 함께 영면하시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순국선열과 청년을 비롯한 호국영령들이
우리나라를 지켜주시고 우리 국민들은
세계 속에 우뚝 서는 대한민국으로 발전을 이루어갈 수 있기를 기원한다.
※ 청년: 오순종, 청년의 어머니: 주단오, 청년의 형:오순철, 청년의 조카: 오동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