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반란군을 살려낸 사람
세포마을 박정근씨 이야기
한국전쟁 당시 세포마을의 이장은 박정근씨였다. 그는 6남매의 장남으로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홀어머니의 보살핌으로 어렵게 성장했다.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했으나 매우 영리하고 똑똑해서 마을에서 천재로 불리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 건너가 탄광 조선소 등에서 일하다가 자영업으로 약간의 돈을 벌어 돌아왔다. 그는 30여 마지기의 논을 사서 3마지기는 출가한 누님에게, 7마지기는 아랫동생에게 나눠주고 남은 땅으로 농사를 지었다. 이후 잠시 만주로 건너갔으나 곧 돌아왔으며 해방을 맞았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가족들을 데리고 국군이 지배하는 장성 읍내로 피난을 나왔다. 마을은 밤에는 반란군이, 낮에는 국군과 경찰이 지배하는 시기였다. 박정근은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다섯 살 딸과 갓 돌이 지난 아들이 있었다. 장성 읍내에서 곡식을 빌려서 연명하였으나 곧 식량이 떨어져 굶주리게 되었다. 이에 아내 문명순이 피난 나온 마을 사람 몇과 함께 이십 리쯤 떨어진 세포마을의 집으로 양식을 가지러 갔다가 반란군들에게 잡혀 돌아오지 못했다.
인민군이 북으로 쫓겨간 후 점차 치안이 유지되기 시작했다. 40호가 넘는 마을은 반란군 소탕작전을 위해 모든 가옥은 불타버렸다. 마을 사람들은 인근 장산리나 송현리에서 방을 얻어 살면서 낮에는 마을로 돌아와 농사를 지었다.
박정근씨의 아내와 함께 식량을 가지러 갔다가 잡혀간 사람들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어린 아들은 젖을 먹지 못해 밤낮을 울어댔다. 박정근씨는 용돈을 주어 동네 아이들을 시켜 개구리를 잡아다가 그 뒷다리를 고아서 나온 육수에 죽을 쑤어 먹였다. 때론 이웃 아주머니들이 젖을 먹여주기도 하고 십 리쯤 떨어진 곳에 시집을 가서 사는 여동생이 달려와 젖을 먹여주고 돌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젖먹이를 엄마 없이 키운다는 것은 우유나 이유식이 없었던 당시로서는 너무 힘겨운 일이었다. 박정근씨는 깊을 슬픔과 고민 속에 빠져 들어갔다. 비록 어머니를 잃은 자식이지만 잘 키워내고 싶었다. 더구나 아들은 집안의 장손이었다. 이 아이를 어떻게든 복을 받고 잘 살게 하고 싶었다. 오랜 고심 끝에 그는 결심을 했다.
그는 아내를 죽인 반란군들을 살려내기로 작정한 것이었다. 당시 반란군들은 국군과 경찰에 쫓겨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숨어 살았다. 겨울이 다가오자 날은 갈수록 추워지고 굶주려 죽어갔다. 박정근씨는 그들을 자수시켜 자유 대한민국에서 살게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반란군에 가담한 집을 찾아가 그 부모들을 설득했다. 자수하면 자기가 보증을 서서라도 책임지고 살려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들은 박정근을 믿을 수 없었다. 더구나 자기편에서 박정근의 아내를 죽인 것은 모두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산속에서 숨어지내는 반란군은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음도 알았다. 산속에서 죽어가던 한 반란군은 깊은 밤 몰래 자기집에 돌아와 따뜻한 밥 한 그릇 먹고 죽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래서 한밤중에 자기 집으로 돌아와 허겁지겁 밥을 먹고 난 그는 이젠 산속으로 들어가더라도 꼼짝없이 굶어죽거나 얼어죽는다는 것을 생각하니 일어서지지가 않았다.
그는 부모를 통해서 전해 들은 박정근씨의 말대로 자수하기로 했다. 박정근씨는 비록 무관의 촌부였지만, 매우 대차고 언변이 뛰어났으며, 그의 행동이 예사롭지 않아서 지역사회에서 남다른 신뢰를 받고 있었고,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 뜻을 전달받은 박정근씨는 지서로 달려가 지서장을 설득했다. 이제 전쟁은 끝나고 평화가 왔는데 더이상 생명의 희생은 없어야 한다고. 이쪽이든 저쪽이든 한 마을에서 오순도순 살아가던 사람들이었다고. 그리고 또 오래도록 이 땅에서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고. 자기가 보증을 서서 책임지고 자유 대한국민을 만들겠다고.
지서장은 결단을 내렸다. 박정근은 그 사람을 데리고 지서로 갔다. 자수서와 전향서를 썼다. 물론 박정근씨도 신원보증서를 썼다.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은 뺨 한 대도 맞지 않고 자유 대한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는 며칠 동안이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보냈으나 경찰은 아무런 처벌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용서를 받았음을 알았다. 자기가 용서받았음을 확신한 그는 산속의 반란군 동지들에게 연락을 취하여 박정근을 통하여 그들을 자수를 시켰다. 꼬리에 꼬리를 문 자수행렬이 이어졌다. 이 소문은 산속에 퍼져 장성군의 반란군은 물론 고창, 순창지역의 반란군까지 장성으로 와서 박정근씨를 통해 자수하였다. 그 수가 혹은 118명이라 하고, 혹은 186명이라 한다. 그 수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반란군에 가담했던 많은 사람들이 살게 된 것은 분명했다.
박정근씨는 아내의 시신을 찾고 싶었다. 그러나 아내가 묻힌 곳을 백방 수소문하고 찾아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 자수한 그들도 시신이 묻힌 곳에 대해선 입을 열지 않았다. 시신이 묻힌 장소를 알려준다는 것은 자기들이 죽였음을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박정근은 그들과 마을사람들을 동원하여 시신을 찾기로 했다. 모두 괭이나 삽, 막대기를 가지고 마을 앞 정자나무 아래도 모이도록 지시했다. 그때만 해도 박정근씨의 지시에는 사람들 모두 거역할 수 없었다. 마을 사람들과 특히 자수한 반란군들은 모두 모여들었다. 이삼백 명이 모였다. 근처의 모든 산과 골짜기를 뒤졌다. 10여 일을 뒤진 끝에 세포 저수지와 모암 사이의 산골짜기에서 아내와 함께 살해당한 몇 사람의 유골을 찾아냈다. 아내의 옷섶에서 박정근의 도민증이 나왔다. 다른 시신들은 키나 머리 모양, 비녀, 신발 등으로 각자의 시신을 분류했다.
박정근은 이장 외에 공직을 맡은 적도 없고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사람이었지만, 소박한 믿음과 기원, 즉 자식을 복 받게 하기 위해 원수들을 용서하고 그들의 목숨을 살려준 사람이었다. 그것도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을.
세월이 흘러 함께 살던 사람들은 수명을 다하거나 흩어져 갔다. 그때 죽이고 피를 흘리던 이 땅의 역사는 조용히 흘러갔다. 그리고 박정근씨도 이 땅에서 이름 없이 살다가 이름 없이 죽었다. 그의 이야기도 무심한 세월에 묻혀 갔다. 그러나 이름 없는 거인의 위대한 흔적이 이대로 묻혀서는 안 된다. 그때 그로 인해 살아남은 사람들과 그 후손들은 어디선가 희로애락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아름다운 나라, 작지만 세계를 주도해 나가는 이 복된 나라에서---.
제공 : 세포마을 출신 전 전남문협회장, 시인 박형동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