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계루 제영시(題詠詩)
- 낭송 : 소천 김재선 -
1.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제영시
시 제목: 쌍계루에 시를 지어 붙이다[寄題雙溪樓]
求詩今見白巖僧 지금 시를 청하는 백암사 스님을 보니
구시금견백암승 이요
把筆沉吟愧未能 붓을 잡고 읊조리매 재능 없어 부끄럽네.
파필침음괴미능 이라.
淸叟起樓名始重 청수가 누각 세워 비로소 이름 중해졌고
청수기루명시중
牧翁作記價還增 목옹이 기문 짓자 값이 더욱 높아 졌네.
목옹작기가환증
烟光縹緲暮山紫 안개가 아득하니 저녁 산은 붉은빛이고
연광표묘모산자
月影徘徊秋水澄 달빛이 배회하니 가을 시내물이 맑구나.
월영배회추수징
久向人間煩熱惱 오랫동안 속세에서 번뇌로 시달렸으니
구향인간번열뇌
拂衣何日共君登 어느 날 옷을 떨치고 그대와 함께 오를까
불의하일공군등
* 정몽주 : 1337년(충숙왕 복위 6)∼1392년(공양왕 4). 고려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 영일(迎日). 자 달가(達可). 호 포은(圃隱). 시호 문충(文忠). 영천(永川)에서 태어났다. 의창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유학을 보급하였으며, 성리학에 밝았다. 《주자가례》를 따라 개성에 5부 학당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진흥을 꾀했다. 명나라를 배척하고 원나라와 가깝게 지내자는 정책에 반대하고, 끝까지 고려를 받들었다. 정도전(鄭道傳) ‧ 이성계 같은 역성혁명파와 뜻을 같이 했지만, 고려왕조를 부정하고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는 데는 반대하여, 이성계 세력에게 사살되고 말았다. 시문에도 뛰어나 시조 〈단심가(丹心歌)〉 외에 많은 한시가 전해지며 서화에도 뛰어났다. 문집에 《포은집(圃隱集)》이 있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제영시
시 제목: 쌍계루의 포은의 시를 공경히 차운하다[雙溪樓 敬次圃隱韻]
樓頭識面兩三僧 누각 위에 얼굴 아는 몇몇 승려들
누두식면양삼승
持守前規喜爾能 능히 예전 법규를 지키니 기쁘구나.
지수전규희이능
絶澗言因淸叟懇 절간의 말은 청수 의 간청 때문이고
절간언인청수간
烏川句爲牧翁增 오천의 시구는 목옹 위해 더 해졌네
오천구위목옹증
曾聞寫記巖爲幻 환암이 기문 썼다 일찍이 들었는데
증문사기암위환
今見隨行號偶澄 이제 수행한 분 우연히 법호가 징(澄)일세
금견수행호우징
扶病懶經頑石路 병든 몸 부축해 돌길을 더디게 지나니
부병나경완석로
春風奈負少年登 어찌 소년 시절 봄날에 오르지 않았을까
춘풍내부소년등
* 김인후 : 1510(중종 5)∼1560(명종 15).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 울산. 자 후지(厚之). 호 하서(河西)·담재(澹齋). 시호 문정(文正). 1510년 전라도 장성현 대맥동리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5대조 김온(金穩)은 서울에서 살았으나 세자 책봉에 연루되어 사사되자 가족들은 전라도 장성 땅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김안국(金安國)의 제자로 성균관에 들어가 이황(李滉)과 함께 학문을 닦고 1540년(중종 35) 문과에 급제,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 등을 지냈다.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난 후에 병을 이유로 고향 장성(長城)에 돌아가 성리학의 연구에 정진, 누차 교리(校理)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문묘(文廟)를 비롯하여 장성의 필암서원(筆巖書院), 남원의 노봉서원(露峯書院), 옥과(玉果)의 영귀서원(詠歸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하서전집(河西全集)》이 있다.
우참찬(右參贊) 면앙(俛仰) 송순(宋純) 제영시
- 낭송 인제 김형열 -
宴坐淸樓共夏僧 맑은 누각 여름철 스님과 편히 앉으니
연좌청루공하승
山中勝事說猶能 산중에 좋은 일을 잘 이야기 해 주네
산중승사설유능
逶迤澗曲迴疑斷 시내는 돌아 흘러 끊겼는지 의심되고
위이간곡회의단
迢遞峯巒亂若增 멀리 어지러운 산들은 더욱 늘어난 듯
초체봉만란약증
巖白却嫌雲妬色 바위의 흰 빛은 구름조차 질투하는 듯
암백각혐운투색
月明還與水俱澄 달은 밝은데 더욱 시내와 함께 맑구나
월명환여수구징
徘徊謝盡人間夢 천천히 거닐며 속세의 꿈 모두 버리고
배회사진인간몽
萬丈丹梯擬一登 만길 붉은 사다리에 한번 오르고 싶네
만장단제의일등
* 송순(宋純) : 1493(성종 24)∼1582(선조 15). 조선 중기의 문신. 조선 중기 때의 문신. 면앙정가단의 창설자이자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선구자이다. 담양출생이다. 본관은 신평(新平). 자는 수초(遂初) 또는 성지(誠之), 호는 기촌(企村) 또는 면앙정이다. 1519년(중종 14)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20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533년 김안로(金安老)가 권세를 잡자, 귀향하여 면앙정을 짓고 시를 읊으며 지냈다. 1537년 다시 벼슬하여 사헌부집의, 홍문관부제학, 충청도어사, 경상도관찰사, 사간원 대사간, 대사헌, 이조참판 등의 요직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