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의 세상사는 이야기
서럽게 피는 꽃
icon 박형동
icon 2015-05-17 20:15:17  |  icon 조회: 1992
서럽게 피는 꽃


1
왜 이제야 피느냐
왜 하필 길가에서 피느냐
채이고 밟히며 천하게 피느냐
이파리는 찢기고
어여쁜 꽃잎마저 시들어
보는 마음을 애잔케 하느냐

사랑했던 것이냐
아무도 몰래 사랑했던 것이냐
사랑이야 아무도 말릴 수 없는 것이지만
이루지 못할 사랑을 했던 것이냐
해서는 안 될 사랑을 했던 것이냐
한 해는 이렇게 저물어 가는데
너는 열매도 없고 씨알도 없이
사랑만 하다가 말라가는 것이냐

아 그렇구나, 그랬구나.
긴 밤을 떨며 새운 벌나비가
쳐져버린 네 젖을 빨고 있었구나.
길손이 네 향기를 맡고 있었구나.
아 그렇구나, 그랬구나.
춥고 주린 벌을 사랑하고 있었구나.
지친 길손을 사랑하고 있었구나.

한 해가 이렇게 저물도록
끝사랑을 하고 있었구나.
돌아오는 길에는 나를 반겨다오
눈 쌓인 길을 웅크리고 돌아오는 그 길에
덤불 속에 마지막 한 송이로 피어
터벅거리는 발걸음을 기다려다오
숨어서 숨어서 날 기다려다오
끝사랑으로 날 기다려다오

2
그 몸으로 사랑했더냐
가슴은 마르고 살은 찢긴 채로
비바람에 맞고 발길에 밟히면서
그 긴 세월을 다 견디며
한 가지로 사랑을 했더냐

가난한 풀꽃 몇 송이 피우고
그 씨알 몇 개를 전하기 위해
늦가을 초겨울이 다 오도록
무서리에 얼었다가 살아나면서
그 몸으로 견디었더냐
그 몸으로 사랑했더냐

예쁜 꽃들은 피었다가 제 자리로 돌아가고
무성하게 푸르던 잎들도 다 떨어져버렸는데
너 홀로 이 계절을 지키고 있는 것이냐
바람 찬 이 길목을 지키고 있는 것이냐

아무도 보아주지 않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무심한 길가의 마른 덤불 속에
숨어 핀 풀꽃 몇 송이
사랑이 아니었으면 어찌 견디었으랴
꿈이 아니었으면 어찌 견디었으랴

아름다움을 포기한 꽃이여
낯 내기를 포기하고 숨어서 피는 꽃이여
끝내는 덤불처럼 묻혀져 가는 꽃이여
지상에서 가장 슬프고 아름다운 꽃이여
나를 닮아서 나를 아프게 하는 꽃이여
나를 사랑해서 나를 아프게 하는 꽃이여
2015-05-17 20: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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