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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한강에 흐르는 라인강의 기적’ 백영훈 씨 증언(펌)</p> <p> </p> <p>백영훈(白永勳, 1930년 7월 20일, 전북 김제)은 경제학자 출신의 대한민국 정치인이다.</p> <p>“50년 전 경제부흥의 초심’에서 배운다.”</p> <p>대한민국 국정교과서 경제사에 꼭 실려야 할 소중한 현대사!</p> <p>읽다보면 목젖이 울컥,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천지개벽의 순간순간들⚋⚋.</p> <p> </p> <p>1961년 5월 16일 군대를 앞세워 집권한 박정희는</p> <p>‘하면 된다.’는 의지만 확고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p> <p>하지만 ‘경제’는 의욕만 갖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p> <p>집권하며 내걸었던 공약대로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p> <p>해결하고자 하는 열망은 강했지만 안타깝게도 ‘돈’이 없었다.5·16군사정변 직후인 1961년 11월</p> <p>미국의 원조를 기대하고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찾아간 그는 문전 박대당한다.</p> <p>미국 측에서 보기에, 준비해 들고 간 사업계획서들이 황당하기도 했지만</p> <p>당시 케네디 정부는 5·16군사정변 자체를 곱지 않은 눈길로 보고 있었다.</p> <p>거기다 한국에 돈을 빌려 주면 쿠데타를 인정하는 꼴이 되고</p> <p>이로 인해 아시아 전체로 쿠데타가 파급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p> <p> </p> <p>그 무렵 베트남, 말레이시아, 필리핀에서 연이어 쿠데타 조짐이 일고 있었다. 미국 금융기관들도 야박하게 퇴짜를 놓기는 마찬가지였다.</p> <p>겉으로는 무상 원조를 주고 있는 나라에 차관까지 주는 것이 말이 안 된다고 했지만</p> <p>속으로는 한국의 미래를 불신하고 있음이 역력했다.</p> <p>미국 다음으로 기댈 수 있는 나라는 일본밖에 없었지만</p> <p>‘국교도 없는 나라에 어떻게 돈을 빌려 주느냐?’고 하니 할 말이 없었다. 박정희는 새로운 나라를 주목하고 있었으니 바로 ‘라인 강의 기적’으로 불리며</p> <p>신흥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던 서독이었다.</p> <p>서독 경제는 1950년부터 매년 연평균 8%대의 실질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었다.</p> <p>우리처럼 분단국가의 아픔, 패전의 상처를 딛고 당당하게 일어서는 서독의 모습을 보며</p> <p>박정희는 ‘우리도 전쟁의 잿더미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뤄 보자’라는 각오를 갖게 되었다.</p> <p>박정희 군사정부는 1961년 11월 말 정래혁 상공부 장관을 주축으로</p> <p>‘차관 교섭 사절단’을 구성해 서독으로 보내기로 했다.</p> <p>그런데 주독(駐獨) 대사관에도, 사절단에도 독일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다.</p> <p>수소문 끝에 알아보니 이승만 대통령 시절 국비 유학생으로 서독(뉘른베르크 에를랑겐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독일 경제학 박사 1호 백영훈 씨(83·현 한국산업개발연구원장)가 안테나에 걸렸다.</p> <p>그는 중앙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백 원장은 사절단의 공식 통역관으로 합류한다. 사절단은 서독에 도착하긴 했지만 관료들 중 누구도 한국 사람들을 만나 주려 하지 않았다.</p> <p>“당시 우리 처지는 지금으로 치면 아프리카 최빈국 같은 나라였다.</p> <p>듣도 보도 못한 가난한 나라에서 차관 교섭 사절단이라고 갑자기 찾아와 돈을 빌려 달라고 하면 누가 만나 주겠는가?”당시 서독의 경제장관은 2년 뒤 총리가 되는 루트비히 에르하르트였다.</p> <p>백 원장은 궁리 끝에 에르하르트 장관과 같은 대학을 나온 자신의 대학 은사를 찾아갔다.</p> <p>“한국의 딱한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장관을 만나게 도와 달라고 사정했지만</p> <p>은사 역시 도와줄 수 없다는 이야기만 되풀이했다. 나중엔 집에 오는 것조차 반기지 않았다.</p> <p>결국 일 아침 6시 교수 댁 앞으로 가서 사모님이 밖으로 나올 때까지 기다리다</p> <p>마주치면 눈물로 호소했다. ‘사모님, 저를 살려 주세요. 장관님 좀 만나게 해 주세요.’”그렇게 일주일이 지나자 은사에게서 연락이 왔다. “차관과의 약속을 잡았다”는 것이다.</p> <p>1961년 12월 11일 한국 사절단은 마침내 루트거 베스트리크 차관과 만난다.</p> <p>그리고 이튿날에는 장관까지 만날 수 있었다.</p> <p> </p> <p>한국은 마침내 1억5000만 마르크(당시 3000만 달러)의 상업차관을 빌리는 데</p> <p>성공한다. 사절단은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p> <p>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상업차관이었다.사절단은 귀국하고 백 원장은 뒷마무리를 위해 독일에 남기로 한다.</p> <p>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은행의 지급 보증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p> <p>한국의 재무부를 중심으로 해외 은행들을 수소문했지만</p> <p>국가 신인도가 없었던 한국에 지급 보증을 해 주겠다는 나라는 없었다.</p> <p>기적적으로 성공한 차관 협상이 물거품이 되어 버릴지 모르는 상황이었다.</p> <p>다시 백 원장의 말이다.</p> <p>하인리히 뤼브케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마치고 독일 최고훈장인</p> <p>특등십자대공로훈장을 받은 박정희 대통령. 한국 정부도 서독 대통령 내외에게</p> <p>대한민국 최고 훈장인 무궁화대훈장을 수여했다.</p> <p> </p> <p>“못사는 나라 국민의 심정이 얼마나 가슴 찢어지는 일인지</p> <p>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나는 매일 울면서 독일 친구들을 만나러 다녔다.</p> <p>‘돈 꾸러 왔는데 지급보증 서 주는 데가 없어 돈을 가져 가지 못하고 있다,</p> <p>이번 일을 성공시키지 못하면 나는 독일에서 그냥 죽어버릴 것’이라고 했다.</p> <p>어느 날 소식을 들었는지 대학에서 같이 공부했던 친구 슈미트가 찾아왔다.</p> <p>그는 당시 서독 정부에서 노동부 과장으로 일하고 있었다.”</p> <p>슈미트 과장은 대뜸 백 원장에게 “너희 나라 길거리에 실업자가 많지 않으냐?”고 물었다.</p> <p>백 원장은 “그런데?”라고 되물었다. 슈미트 과장은 다음 날</p> <p>두꺼운 서류 뭉치를 들고 다시 나타났다.“지금 서독은 탄광에서 일할 광부가 모자란다.</p> <p>웬만한 데는 다 파내 지하 1000m를 파고 내려가야 하는데</p> <p>너무 뜨거워 다들 나자빠져 있다. 파키스탄, 터키 노동자들도 다 도망갔다.</p> <p>혹시 한국에서 한 5000명 정도를 보내 줄 수 있겠느냐.</p> <p>간호조무사도 2000명가량 필요하다. 체 닦는 험한 일도 해야 하는데</p> <p>독일인은 서로 안 하려고 한다. 만약 광부와 간호사를 보내 줄 수만 있다면</p> <p>이 사람들 급여를 담보로 돈을 빌릴 수 있다.”백 원장은 즉시 신응균 주독 대사를 찾았다. 신 대사는 백 원장의 말을 듣더니</p> <p>“5000명이 아니라 5만 명도 가능한 것 아니냐”고 했다.</p> <p>달러와 일자리가 부족한 한국으로서는 마다할 일이 아니었다.</p> <p>신 대사는 본국에 긴급 전문을 넣었고 한국에서는 바로 모집 공고가 난다. 당시 서독 광부의 한 달 임금은 국내 임금의 7∼8배에 달했다.</p> <p>비행기 자체를 타기도 어려운 시절이다 보니 고임금을 받고</p> <p>서독 같은 선진국에서 일할 수 있다는 생각에 수많은 사람이 몰렸다.</p> <p>한국의 실업률은 40%에 육박했으며 1인당 국민소득은 79달러로</p> <p>필리핀(170달러) 태국(260달러)에도 크게 못 미쳤다.</p> <p>한국은행 외환보유고 잔액이 2000만 달러도 되지 못했던 시절이다.1차 광부 500명 모집에 2894명이 몰렸다. 6 대 1의 경쟁률이었다.</p> <p>선발 자격을 2년 이상 경력을 가진 사람으로 내걸었는데도</p> <p>도시에 사는 경험 없는 대학 졸업자들도 무조건 신청했다.</p> <p>탄광 갱도조차 구경 못한 ‘가짜 광부’들이 서류를 가짜로 만들어 응모했다.</p> <p>1963년 9월 13일자 경향신문은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신체검사에서 실격된 1600명을 제외한 1300여 명 중 절반이 광부 경력이</p> <p>없는 고등실업자임이 밝혀졌다. 노동청 관계자에 의하면 이들 광부 모집에</p> <p>응모한 가짜 광부들이 300원 내지 500원으로 짜 광산취업증명서를 사서</p> <p>제출했으며 이 증명서 중에서 유령 광산 20여 개소가 발견되었다.</p> <p>노동청은 전국 광산지역에 감독관을 파견해 유령 광산에 대한 조사를 할 계획이다.’실제로 1963년부터 1966년까지 독일에 입국한 광부의 30%가 대학 졸업자였다.</p> <p>서독 루르 지방으로 파견된 광부들은 거의 대학 졸업자였다. 다들 관심이 높았던 사안이었던지라 노동부는 1차 모집에 합격한 응시자들을</p> <p>마치 고시합격자 발표하듯 각 신문에 명단을 실을 정도였다. 드디어 1963년 12월 22일 오전 5시 독일 뒤셀도르프 공항에 광부 1진 123명이 도착했다.</p> <p>이들은 북부 함보른 탄광과 뒤셀도르프 서쪽 아헨 지역에 있는 에슈바일러 탄광에 배정됐다.</p> <p>파독 광부들은 지하 갱도 곳곳에서 땀과 눈물을 흘렸다.</p> <p>심지어 목숨까지 잃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연금 저축 생활비를 제외한 월급을 고스란히</p> <p>조국에 있는 가족에게 송금했다.</p> <p>1977년까지 독일로 건너간 광부는 7932명, 간호사는 1만226명이다. 이들의 수입은 한국 경제 성장의 종잣돈 역할을 했다.</p> <p>이들이 한국으로 송금한 돈은 연간 5000만 달러로 한때 한국 국민총생산(GNP)의 2%에 달했다.</p> <p>광부와 간호사들의 파독 계약 조건은 ‘3년간 한국에 돌아갈 수 없고</p> <p>적금과 함께 한 달 봉급의 일정액은 반드시 송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p> <p>이들의 급여는 모두 독일 코메르츠방크를 통해 한국에 송금됐다.</p> <p>이 코메르츠방크가 지급 보증을 서서 차관 도입이 이뤄진 것이다</p> <p>우여곡절 끝에 차관 미션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백 원장은</p> <p>지친 몸을 이끌고 귀국한 뒤 다시 중앙대 교수로 복직한다.3년이 흐른 1964년 말, 백 원장은 다시 한번 박정희 대통령의 급작스러운 호출을 받는다.</p> <p>박 대통령은 그 전해인 1963년 10월 군정(軍政)을 끝내고 민간인 자격으로</p> <p>대통령선거에 출마해 15만 표라는 근소한 차로 윤보선 후보를 누르고</p> <p>제3공화국 대통령이 된 터였다.박 대통령은 백 원장을 현관까지 나와 기다려 맞았다.</p> <p>그러면서 그에게 “한번만 더 도와 달라”고 부탁한다.</p> <p>서독 하인리히 뤼브케 대통령이 박 대통령을 국빈 자격으로 초청했는데</p> <p>통역관이 되어 달라는 것이었다.</p> <p>서독으로 떠날 날만 기다리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p> <p>청와대 회의가 있다고 해서 가 보니 다들 심각한 표정이었다.</p> <p>서독으로 갈 비행기가 없다는 거였다.</p> <p>“당초 5만 달러를 주고 20일 동안 미국의 노스웨스트 에어라인에서</p> <p>비행기를 빌렸는데 미 의회가 쿠데타로 집권한 한국 군인이</p> <p>미국 비행기를 이용하면 다른 나라를 자극한다고</p> <p>갑자기 취소해 버리고 만 거였다. 독일 방문 열흘 전이었다.”백 원장은 그 자리에서 대통령 특사로 임명됐다.</p> <p>당장 서독으로 날아가 서독 정부에 비행기를 제공해 달라고 부탁하라는 것이었다.</p> <p>백 원장은 궁리 끝에 일제강점기 때 독일에서 유학했으며 제3공화국 초대 총리를 지내고 물러난 최두선 전 동아일보 사장에게 부탁하여 함께 서독으로 날아갔다.</p> <p>최 전 사장은 독일에 두터운 인맥을 갖고 있었다.백 원장 일행은 박정희 대통령의 방독(訪獨) 일정을 상의하겠다며</p> <p>뤼브케 대통령의 비서실장과 노동부 차관을 함께 만났다.</p> <p>이 자리에서 비행기 이야기를 꺼내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p> <p>그렇지만 두 눈을 크게 뜨고 용기를 내 운을 뗐다.</p> <p>“비행기가 없다. 서독이 잘사는 나라이니 비행기 좀 제공해 주면 안 되겠느냐?”</p> <p>다들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었다.“독일 관료들이 한동안 물끄러미 우리를 쳐다보더니 일단 돌아가라고 했다.</p> <p>우리는 안 되는 줄 알았다. 떠나기 사흘 전까지 연락이 없었으니까.</p> <p>그러다 떠나기 직전 비행기를 제공하겠다는 연락이 왔다.</p> <p>결국 1964년 12월 3일 홍콩을 경유해 서독으로 들어가는 루프트한자</p> <p>여객기(보잉 707)가 경로를 변경해 서울에 착륙했다.</p> <p>박 대통령이 그 비행기를 타고 독일에 갔다.”대통령 전용기가 아니라 일반 사람들이 타는 상용 노선에 취항 중이던</p> <p>비행기에 급히 타게 된 것이다. 박 대통령은 홍콩 방콕 뉴델리 카라치</p> <p>카이로 로마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쾰른 공항까지 무려 28시간이나</p> <p>걸려 독일 땅을 밟을 수 있었다.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가난하고 해외 경험이 없었는지는</p> <p>비행기에 동행했던 조선일보 정치부 이자헌 기자의 회고</p> <p>(‘파독 광부 45년사’)에 잘 나와 있다.“대통령과 장관들은 1등석에 타고 다른 일행은 이코노미석에 탔다.</p> <p>화장실에 가 보니 이상하게 생긴 물건이 거울 앞에 있었다.</p> <p>이게 무슨 용도냐를 두고 논란이 일었다.</p> <p>그때 여기자로 유일하게 수행기자로 포함됐던 한국일보 정광모 기자가</p> <p>‘물비누’라고 설명해 줘 실소를 금치 못했다.</p> <p>기자들도 국제적 촌놈이었고 대통령 일행도 참 초라한 행차였다.</p> <p>기내의 박 대통령 표정도 밝지는 않았다.”박 대통령이 서독에 국빈 자격으로 초청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p> <p>그 전해 말부터 파견되기 시작한 서독의 광부들 때문이었다.</p> <p>백 원장의 설명이다. “연일 서독 신문과 방송에서 헌신적으로 일하는 한국 광부들에 대한</p> <p>이야기가 실렸다. 지하 갱도 1000m에서도 시간외 근무를 마다않고 일하는 광부들의 모습이TV에 방영되자 서독인들이 크게 감명을 받았다.</p> <p>마침내 국회의원들이 국회에서 ‘한국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p> <p>한국의 대통령을 초청해 우리의 마음을 전하자’는 결의안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28시간의 긴 비행 끝에 도착한 박 대통령 일행은</p> <p>1964년 12월 5일 대통령과 총리의 따뜻한 환영을 받는다.</p> <p>백 원장은 그날 에르하르트 총리가 열어 준 만찬 자리에서 보여 준</p> <p>박 대통령의 모습을 평생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동양의 가난한 나라에서 온, 당시 마흔 일곱이던 박 대통령은</p> <p>서독 총리를 앞에 놓고 ‘우리 국민 절반이 굶어 죽고 있다’고 울먹이며 말했다.</p> <p>그러면서 ‘우리 군인들은 거짓말 안 한다. 빌린 돈은 반드시 갚는다.</p> <p>도와 달라. 우리 국민 전부가 실업자다. 라인 강의 기적을 우리도 만들겠다’고 했다.</p> <p>눈물을 흘리는 박 대통령 말을 통역하며 나도 같이 울었다.”“왜 쿠데타를 했느냐?”라고 묻는 총리의 질문에</p> <p>박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우리 한국도 서독과 마찬가지로 공산국가들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다.</p> <p>공산국가들을 이기려면 우선 잘살아야 한다. 내가 혁명을 한 이유는 정권을 탐해서가 아니다. 정치가 어지럽고 경제가 피폐해져 이대로는 대한민국이 소생할 수 없다는</p> <p>위기의식 때문이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돈이 없다.</p> <p>돈을 빌려 주면 반드시 국가 재건을 위해 쓰겠다.”이날 에르하르트 총리는 향후 한국의 역사를 바꿔 놓을 여러 가지 조언을 한다.</p> <p>백 원장은 두 사람이 나눈 대화를 낱낱이 기록했고, 외무부에 그 기록을 넘겼다.</p> <p>“박 대통령의 말이 끝나자 총리가 대통령의 손을 꼭 잡더니 이렇게 말했다.</p> <p>그는 박 대통령의 열정과 사명감에 감화된 듯 자신의 경험을 차분하게 이야기하며</p> <p>한국을 위한 조언을 했다.”에르하르트 총리는 이렇게 말했다.</p> <p>“내가 경제장관 할 때 한국에 두 번 다녀왔다.</p> <p>한국은 산이 많던데 산이 많으면 경제발전이 어렵다.</p> <p>고속도로를 깔아야 한다. 독일은 히틀러가 아우토반(고속도로)을 깔았다.</p> <p>고속도로를 깔면 그 다음엔 자동차가 다녀야 한다.</p> <p>국민차 폴크스바겐도 히틀러 때 만든 것이다.”눈을 반짝이는 박 대통령을 바라보며 총리의 말이 이어졌다.</p> <p>“자동차를 만들려면 철이 필요하니 제철공장을 만들어야 한다.</p> <p>연료도 필요하니 정유공장도 필요하다. 경제가 안정되려면</p> <p>중산층이 탄탄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중소기업을 육성해야 한다.</p> <p>우리가 돕겠다. 경제고문을 보내 주겠다.”</p> <p>실제로 박 대통령 귀국 이후 서독은 다섯 명의 경제고문을 한국으로 보낸다. 독일 초대 경제부 장관(1949∼1963)을 지낸 에르하르트 총리는</p> <p>이런 점에서 우리에겐 은인과 같은 존재다.</p> <p>당시 박 대통령을 만났을 때 서독 2대 총리(1963∼66년)로 재임하고 있던 그는</p> <p>전쟁의 폐허에서 허덕이던 독일인들에게 ‘모두를 위한 번영’을 슬로건으로 내걸고</p> <p>독일 경제를 일으켰다. 이날 그는 또 박 대통령에게 “일본과도 손을 잡아라”는</p> <p>파격적인 조언도 했다.</p> <p>“독일은 프랑스와 16번을 싸웠다. 독일 사람들은 지금도 프랑스에 한이 맺혀 있다.</p> <p>그렇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우리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가 프랑스 드골 대통령을 찾아가 악수했다. 한국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p> <p>그것이 공산주의를 막는 길이기도 하다.”백 원장은 “박 대통령이 그 이야기를 듣더니 화난 표정으로</p> <p>‘우리는 일본과 싸운 일이 없다. 매일 맞기만 했다’고 말하자,</p> <p>에르하르트 총리는 ‘지도자는 미래를 봐야 한다.’고 답했다”고 전했다.</p> <p>에르하르트 총리의 말은 결국 이듬해인 1965년 한일협정 체결로 결실을 보게 되었다.</p> <p>이날 두 사람의 대화는 한국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된 셈이다. 이날 에르하르트 총리는 박 대통령의 손을 마주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p> <p>그리고 회담 후 담보가 필요 없는 2억5000만 마르크를 한국 정부에</p> <p>제공하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한다.</p> <p>다음 날은 박 대통령이 독일의 한 공과대에서 강연을 했다.</p> <p>그런데 예상외의 일이 벌어졌다. “독일 사람은 교수가 강의하러 들어오면 박수 대신</p> <p>주먹으로 책상을 수차례 가볍게 두드리는데 사전에 이 이야기를 미처 대통령께 전하지 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박 대통령이 단상에 올라가자 학생들이 너도나도 책상을 두드리는 것이 아닌가. 대통령은 이 모습을 보고 야유를 한다고 생각했다.</p> <p>나는 통역관이라 멀리 떨어져 있어서 제대로 설명할 수도 없고….</p> <p>이 양반 얼굴이 빨개졌다. 당황했는지 미리 준비해 간 원고를</p> <p>제대로 읽지도 못하고 있었다. 조금 있으니 학생들이 또 주먹으로 책상을 두들겼다.</p> <p>그제서야 박 대통령이 ‘아. 무시가 아니라 경청의 의미구나’ 하고 눈치 채고는</p> <p>안심하고 원고를 제대로 읽기 시작했다(웃음). 연설을 마치고 돌아가면서 박 대통령이 내게 ‘이 사람아, 왜 그런 문화가 있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지 않았나?</p> <p>창피당할 뻔했다’고 농담조로 핀잔??주기도 했다.”박 대통령은 가는 곳마다 “한국을 도와 달라”고 호소했다.</p> <p>그날 학생들에게 했던 연설도 “우리도 여러분이 이룬 라인 강의 기적처럼 한강의 기적을 만들겠다. 도와 달라”는 거였다. 박 대통령은 뤼브케 대통령의 안내를 받아 한국의 광부들이 일하는 루르 탄광을 방문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온 대통령을 기다리며 선 광부들의 얼굴엔 온통 석탄이</p> <p>묻어 있었고 작업복 역시 흙투성이였다.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단상에 올랐다.</p> <p>현지 광부들로 구성된 밴드가 애국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p> <p>그런데 아무도 애국가를 따라 부르지 않았다.</p> <p>울음소리가 노랫소리를 덮어 버린 거였다.</p> <p>500여 명의 광부 등 모두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들먹였다. 연주가 끝나자</p> <p>박 대통령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고 코를 풀더니 연단으로 걸어 나갔다.“만리타향에서 이렇게 상봉하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대통령의 준비된 연설은 여기서 몇 구절 더 나아가지 못했다.</p> <p>이 구석 저 구석에서 흘러나오던 흐느낌이 통곡으로 변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p> <p>박 대통령은 아예 원고를 옆으로 밀친 뒤 이렇게 말했다. “이게 무슨 꼴입니까? 내 가슴에서 피눈물이 납니다.</p> <p>광부 여러분, 가족이나 고향 생각에 괴로움이 많을 줄 알지만…</p> <p>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들에게만큼은 잘사는 나라를… 물려줍시다. 열심히 합시다. 나도 열심히….”결국 대통령은 말을 맺지 못하고 소리 내어 울어 버렸다.</p> <p>그 자리에 함께한 서독 대통령도 눈시울을 적셨다.</p> <p>광부들은 대통령이 탄 차 창문을 붙들고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통곡했다.서독에서 머문 일주일(7∼14일) 동안 박 대통령은 자동차 전용도로 아우토반을 달렸고</p> <p>제철소를 견학했다. 가장 관심을 보인 것이 ‘아우토반’이었다.</p> <p>나치 정권하에서 총연장 1만4000km를 목표로 건설하기 시작해 2차 세계대전으로 중단될 때까지 3860km를 완성시켰던 ‘아우토반’은 박 대통령이 방독할 무렵 ‘세계에서 자동차가 가장 빨리 달릴 수 있는 도로’로 유명했다.</p> <p>당시 박 대통령은 서독 측 관계자에게 아우토반의 건설과 관리 방법, 소요 비용과</p> <p>건설 기간, 건설 장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결국 3년 뒤인 1967년 11월 7일 청와대 회의에서 건설부 장관에게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지시하며 직접 진두지휘까지 하기에 이른다. 백 원장은</p> <p>“‘대한민국 건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젊은 박정희’를 바로 옆에서 보았던 경험이</p> <p>나의 평생 삶을 이끌어 준 나침반이다”라고 말한다.</p> <p>“당시 박 대통령을 보며 그가 나라와 국민을 위해 목숨을 걸었구나 하는 강한</p> <p>인상을 받았다. 아우토반에 갔을 때 박 대통령이 중간쯤 자동차를 전부 세우더니</p> <p>차에서 내려 무릎을 꿇고 땅에 입을 맞추었다. 다들 울면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p> <p>육 여사도 서독 방문 내내 눈물을 훔쳤다. 남편 때문에 울고 광부와 간호사 때문에 울고.”백 원장은 마치 어제 일처럼 그때 일이 기억나는지 눈가가 촉촉이 젖어 들고 있었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든 것은 박 대통령 혼자가 아니었다.</p> <p>정든 고향을 떠나 언어도 통하지 않는 물설고 낯선 땅에서</p> <p>목숨 내놓고 일한 광부와 간호사들의 헌신이 없었다면</p> <p>우리는 돈도 빌릴 수 없었고 경제 발전도 없었다.</p> <p>나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한국인들이 정말 자랑스럽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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