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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28 09:04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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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ML> <HEAD> <STYLE> BODY, TR, TH, TD { FONT-SIZE:9pt; FONT-FAMILY:굴림; } P { MARGIN-TOP: 0px; MARGIN-BOTTOM: 0px; FONT-SIZE:9pt; FONT-FAMILY: 굴림; } </STYLE> <BODY leftMargin=8 topMargin=4> <P style="MARGIN-TOP: 0px; MARGIN-BOTTOM: 0px"></P> <P><FONT face=굴림><B><BR>고려 공민왕의 왕사이던 나옹선사는 신륵사를 즐겨찾는 유명한 고승이다. 선사의 이름은 혜근이요, 호는 </B></FONT></P> <P><FONT face=굴림><B>나옹, 속성은 아씨(牙氏)이며, 아명(兒名)은 원혜(元慧)라고 하였다. 선관서(고려 충렬왕 34년(1308)에 대</B></FONT></P> <P><FONT face=굴림><B>관서를 고친 이름. 뒤에 다시 대관서,선관서로 고침)령의 벼슬을 지낸 그의 선고(先考)는 서구(瑞具)였고, </B></FONT></P> <P><FONT face=굴림><B>모친은 정씨로서 영산군 사람임. 하루는 어머니가 꿈을 황금빛 새 한 마리를 보았는데, 그 새가 어머니에</B></FONT></P> <P><FONT face=굴림><B>게로 날아들어 머리를 쪼면서 오색찬란한 알을 품에 떨어뜨리는 꿈을 꾼 후, 이내 태기가 있어 충숙왕(忠</B></FONT></P> <P><FONT face=굴림><B>肅王) 7년(1320) 정월 보름날 원혜를 낳았다. 어렸을 때부터 남달리 영민하였고, 특히 한가지 일에 이심을 </B></FONT></P> <P><FONT face=굴림><B>품으면 그에 관해 골똘히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나 원혜가 20세 되던 해에 그는 동리 친구가 죽는 </B></FONT></P> <P><FONT face=굴림><B>바람에 출가를 결시하게 되었다. 슬픈 생각을 품고 공덕산(功德山) 묘적암의 요연선사(了然禪師)에 게 가</B></FONT></P> <P><FONT face=굴림><B>서 머리를 삭발했다. 이어 여러 고승(高僧)을 찾아 전전하다가 서천(西天)의 지공과 절서의 평산에게 법을 </B></FONT></P> <P><FONT face=굴림><B>이어 받아 그 종풍(宗風:그 종파의 풍습. 한 교파의 종문의 풍습)을 크게 드날렸다. 나옹은 원나라 연도(燕</B></FONT></P> <P><FONT face=굴림><B>都)에 가서 유학하고 법원사(法源寺)의 지공(指空)과 정자선사(淨慈禪師)의 평산(平山)에게 참학(參學)한 </B></FONT></P> <P><FONT face=굴림><B>후에 법의(法衣)와 불자를 받고 오랫동안 불법에 힘쓴 바 있다. 원제도 나옹선사를 칭찬하고 격려하여 광</B></FONT></P> <P><FONT face=굴림><B>제선사(廣濟禪師)에 머무르게 하고 금란가사(金蘭袈裟:금으로 난을 두른 가사. 또는 금란으로 만든 가사)</B></FONT></P> <P><FONT face=굴림><B>와 불자를 내려 그 법을 크게 빛냈고 평소에도 그의 게송(偈頌)을 사람들에게 많이 보냈다. 나옹선사가 평</B></FONT></P> <P><FONT face=굴림><B>산화상(平山和尙)을 찾아 뵈었을 때 일이다. 평산은 물었다.</B></FONT></P> <P><FONT face=굴림><B>"일찌기 어떤 사람을 보았는가?"</B></FONT></P> <P><FONT face=굴림><B>"서천(西天)의 지고(指空)을 보았는데, 그는 날마다 천검(千劍)을 썼습니다."</B></FONT></P> <P><FONT face=굴림><B>"지공의 천검은 그만두고 그대의 일검(一劍)을 가져오라."</B></FONT></P> <P><FONT face=굴림><B>평산의 말이 끝나자, 나옹은 좌복(座伏)하고 있던 방석을 내밀었다. 그 순간 괴이한 일이 일어났다. 솜으</B></FONT></P> <P><FONT face=굴림><B>로 만든 방석이 일순간에 몽둥이로 변하여 내려치는 것이다.</B></FONT></P> <P><FONT face=굴림><B>"이 도적이 나를 죽인다." 평산은 외쳤다.</B></FONT></P> <P><FONT face=굴림><B>"내 검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지만 사람을 살리기도 합니다." 하며 나옹은 쓰러진 평산화상을 일으켰다.</B></FONT></P> <P><FONT face=굴림><B>이 후 평산은 설암(雪菴)이 전한 급암의 가사와 불자로 믿음을 표하였다.</B></FONT></P> <P><FONT face=굴림><B>나옹은 무술년(戊戌年 1358) 봄 수기(授記:불타의 설법 중에서 문답식 또는 분류적 설명으로 되어 있는 </B></FONT></P> <P><FONT face=굴림><B>부분. 불타가 그 제자들에게 미래의 중과에 대하여 미리 예언한 교설. 또는 그러한 예언를 해주는 일)를 얻</B></FONT></P> <P><FONT face=굴림><B>어 귀국해 곧바로 오대산 상두암(象頭菴)에 은신하였다. 공민왕(恭愍王)이 이름을 듣고 사신(使臣)을 보내 </B></FONT></P> <P><FONT face=굴림><B>오기를 청하여 만나보고 공경하여 신광사(神光寺)에 머루르게 하였다.</B></FONT></P> <P><FONT face=굴림><B>그 후 신광사를 떠나 다시 산협(山峽)이 웅좌하며 수려한 용문산, 원적산, 금강산 등지로 순행한 뒤, 보암</B></FONT></P> <P><FONT face=굴림><B>(普巖) 장로가 지공의 유촉(遺囑:살아있을때의 부탁. 죽은 뒤의 일을 부탁함)한 자사 한 벌과 편지 한통을 </B></FONT></P> <P><FONT face=굴림><B>받아가지고 와서 나옹선사에게 주었다. 나옹은 그것을 입고 향을 사른 뒤 보설하였다.</B></FONT></P> <P><FONT face=굴림><B>경술년(庚戌年) 첫 날 아침에 사도달예(司徒達睿)가 지공의 영골 사리를 받들고 회암사(檜巖寺)에 도달했</B></FONT></P> <P><FONT face=굴림><B>다. 나옹은 그 영골에 예배하고 산을 나왔다. 임자년(壬子年) 가을 우연히 지공이 가리킨 삼산 양수의 예언</B></FONT></P> <P><FONT face=굴림><B>을 생각하고 회암사 북쪽 봉우리에 지공의 영골사리를 봉안한 탑을 세웠다. 그 해 9월 23일에 임금이 돌아 </B></FONT></P> <P><FONT face=굴림><B>가시니 몸소 빈전(殯殿)에 나아가 소참(小參) 서식을 갖추어 왕사의 인을 조정에 돌렸다. 무왕께서도 즉위</B></FONT></P> <P><FONT face=굴림><B>한 후 인보를 내시어 왕사로 봉하셨다. 병진년 봄 회암사의 공사를 마치니 서울 밖의 사중들이 구름같이 </B></FONT></P> <P><FONT face=굴림><B>모여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마침 대평(臺評)이 생각하기를 회암사(檜巖寺)는 서울과 가까우므로 사</B></FONT></P> <P><FONT face=굴림><B>중의 완래가 끊이지 않으니 혹 폐엄하게 되지나 않을까 염려하여 임금의 명으로 밀양의 형원사(瀅源寺)로 </B></FONT></P> <P><FONT face=굴림><B>옮기게 되어 나옹의 출발을 재촉하였다. 나옹은 마침 병중에 있어 남녀(藍與)를 타고 삼문(三門)의 남쪽에 </B></FONT></P> <P><FONT face=굴림><B>있는 물가로 나갔다가 스스로 남녀를 멘 사람들을 시켜 열반문(涅槃門)으로 나왔다. 대증은 의아해 울부짖</B></FONT></P> <P><FONT face=굴림><B>었다. "힘쓰고 더욱 힘쓰시오. 나 때문에 중단하지 마시오. 내 걸음은 여흥(驪興)에서 멈출 것이오." 나옹</B></FONT></P> <P><FONT face=굴림><B>선사가 말했다. 한강에 이르러 호송관 탁첨에게 "나는 지금 병이 심하여 배를 타고 가고 싶소."하였다. 그</B></FONT></P> <P><FONT face=굴림><B>리하여 배를 타고 산모퉁이를 헤쳐 유유히 흘러가는 물굽이를 거슬러 배떠난지 이레되는 날 여흥의 경승</B></FONT></P> <P><FONT face=굴림><B>지 신륵사에 이르게 되었다. 병이 조금 덜하기를 기다리는데 여흥수(驪興守) 황희직(黃希直)과 도안감무</B></FONT></P> <P><FONT face=굴림><B>(道安監務) 윤인수(尹仁守)가 탁첨(卓簽)의 명을 받고 출발을 재촉했다. 대자(待者)가 이 사실을 말하자 나</B></FONT></P> <P><FONT face=굴림><B>옹은 말했다. "그것은 어렵지 않다. 나는 마땅히 갈 것이다."하고는 제자들을 불렀다. "노승은 오늘 너희들</B></FONT></P> <P><FONT face=굴림><B>을 위해 열반불사(涅槃佛事)를 지어 바치리라." 하고는 조용히 설법(說法)하시고 고요히 입적(入寂)하시니 </B></FONT></P> <P><FONT face=굴림><B>그 때가 1376년 5월 15일 진시(辰時)다. 스님의 속세(俗歲)는 57세, 법랍(法臘)은 37년 되던 해였다. 나옹</B></FONT></P> <P><FONT face=굴림><B>선사가 입적하실 때 여흥 고을 사람들은 찬란한 오색 구름이 봉미산(鳳尾山)을 휘덮는 것을 보았고, 타시</B></FONT></P> <P><FONT face=굴림><B>던 흰 말은 3일 전부터 풀을 먹지 않은 채 머리를 떨구고 슬피 울었다는 것이다. 다비를 동대에 모시고 사</B></FONT></P> <P><FONT face=굴림><B>리(舍利)를 수습하는데 구름 한 점 없는 날씨에 사수백보 안에 비가 내리고, 사리는 그 수를 헤아릴 수가 </B></FONT></P> <P><FONT face=굴림><B>없었다. 봉미산 마루에 신광(神光)은 비치고 신륵사의 중 달여(達如)는 꿈에 여룡(驪龍)이 소분대(燒焚臺)</B></FONT></P> <P><FONT face=굴림><B>에 서려있다가 강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는데 그 형상이 말과 같았다. 신륵사 봉미산 중턱에 정골사리</B></FONT></P> <P><FONT face=굴림><B>(頂骨舍利)를 모시고 그 외 사리를 모셔가려할 때, 가물어 물이 얕음을 걱정하였는데 갑자기 물이 불어 묶</B></FONT></P> <P><FONT face=굴림><B>였던 배들이 떠갈 수 있어, 여룡이 왔다는 전설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B></FONT></P> </BODY> </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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