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yle="MARGIN-TOP: 0px; MARGIN-BOTTOM: 0px"> face=궁서체
size=4>죽음맞이친구의
마지막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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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새벽에
걸려온 처음 듣는 여자의 전화. (2003년 6월 15일 새벽)
"저는 '준 자(字) 삼 字(자)'의 큰딸인데요 어젯밤에 아버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아버님께서 남겨주신 메모를 보고 알려드립니다. 흐흐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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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기어이
친구가 죽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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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죽으면
영정 사진에 큰 절 두 자리로 마지막 인사를 나눌 친구들의 명단'을
유서처럼 남기고 간암으로 투병하던 친구가 홀연히 떠난 후 그가 생의
마지막 여행중에 보내왔던 편지가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고이 잠드소서!
"삼가 고인의 명복을 기원하오며 편지 전문을
올립니다"
사랑하는
친구여!
통일호 완행열차에 함께 한 봇짐장수
할머니들의 애환(哀歡)을 귀동냥하면서
순천(順天)을 거쳐 오동도에 왔다.
청정바다와 푸른 하늘이 붉은 꽃으로 어울리는
정열은
한 맺힌 여인의 전설처럼 핏빛으로 절규하는 것이 정녕 동백인가 춘백인가?
그것은 60 여 년이 한참 못된 내 삶의 의미를
반추하게 한다.
첫 단추를 잘못 끼어 생활에 급급했고
생각이 휘어졌고
그래서 야맹충처럼 밤을 좋아했고 때론 자학을 은근히 즐기기도 했다.
거울에 비친 주름지고 야윈 내 얼굴 그리고 구겨진
내 의식, 몸이 망가지는 것보다 정신이 매가리 없이 주저앉을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견디기 어렵다.
사람은 당연히 가는 것이고 오늘 나는
조금 더 빨리 가는 것 아닌가?
아아! 밤하늘의 별을 보고 아내와
아이들 몰래 참았던 눈물이 얼마였던가?
이 무슨 업보인가? 아직도 욕심에서 벗어나지 못했단 말인가?
하긴 나약한 인생인
것을-
그것은 자연의 섭리요 우주의 섭리가 아니던가?
본시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으며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것이라는데~
이 모든 것이 욕망 때문이라는
설법을
어리석은 중생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생의 보따리를 싸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고
더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산들거리는 봄바람도 따스한 햇볕도 밤하늘의 별빛뿐이랴!
사랑하는 사람들 임 일 레야 몇 번을 말해도
부족하다
정다운 친우여!
돌산
항일암의 산장에서 개 짖는 소리 닭의 홰치는 소리에
일찍도 잠에서 깨어났다.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낫다.
법정스님 책 몇 장 읽고
번뇌가 접어진다는 해설문을 지나고
하현달과 어우러지는 해돋이에 넋을 잃을 뻔했다.
그래 이 용솟음을 가슴에 안으려고
이곳에 왔다. 새로운 희망이 생긴다.
지금 우리에게 희망이 없는 것은
절망이 없기 때문이다.
생자필멸, 회자정리 어차피 사람은 나그네 인생이 아니던가?
마음을 훑고 가는 해풍처럼 한 조각의 구름처럼
달이 차고 기우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노쇠하기 전 누구나 죽음이라는
불치병을 안고 살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죽음에서 예외적인 존재로
여긴다. 병을 통해서 삶을 다시 생각하고 한계를 느끼고
삶의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켄서는 찾아온 손님이다. 잘
대접(치료)해서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전 서울대 병원장의 말씀이다.
사랑하는 친우여!
자 또
떠나자. 여행을 위한 여행으로-
여수항에서 작은 배를 타고 남해
섬으로 넘어 왔다.
배낭하나 덜렁 메고 쫓길 것도 바쁠 것도 없이 낮선 섬 몇 군데를 어슬렁거리다
삼천포 항으로 건너와서 지친 몸을
바닷가 전망 좋은 모텔에 눕혔다.
따끈따끈한 방에서 배를 깔고 엎드려
또 법정을 몇 장 읽고
평소의 고마움을 편지로
대신한다.
달콤한 피로가 원과 한을 조금은 풀어주는 것 같다.
불치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고 분하고
억울해서 미칠 것 같다고 해도
이것 또한 삶의 맛이 아니겠는가? 그래 진미일 수도 있다. -지나친 역설인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의연해
진다.
다행히 이제는 두려움이나 불안은 친숙한 감정이 됐다. "친숙한 불안" 말 되는가?
자기
몸에서 일어난 일을 받아들임으로써 남은 생을 뜻 있고 보람 있게 살수도 있고
그렇게 해서 생긴 의욕 때문에 생이
연장될 수도 있다고 믿고싶다.
죽음도 삶의 한 과정이니까.
그래서 남아 있는 날들을 소중하게
쓰고싶다.
마음을 비우고서 말이다.
내 주위 정다운 사람들의 눈물겨운 배려 때문이라도 희망을 가져야한다.
아이들을 세상에
남겨놓은 이상
죽어도 아주 죽는 것이 아니라는 믿음에 또 다른 희망이 생긴다.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구원도 인도하심도 한번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하신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느님의 뜻이니라.
매사에 감사하자.
그리고 작은 일에 감사하자.
내일은
진주로 해서 섬진강
압록에서
며칠 간 좀 더 맑은 공기를 마실까한다.
남은 며칠 간의 여정에 감사하며
그동안 나에게 보내준 따스한 정에 눈물겨운
감사를 드린다.
안녕!
size=3> 2001년 3월 삼천포에서 준삼.(주: 이름은
가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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