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 세상사는 이야기_이전
나옹선사에 대해서..(퍼온글)
icon 김시영
icon 2003-10-24 09:56:29  |  icon 조회: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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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공민왕의 왕사이던 나옹선사는 신륵사를 즐겨찾는 유명한 고승이다. 선사의 이름은 혜근이요, 호는


나옹, 속성은 아씨(牙氏)이며, 아명(兒名)은 원혜(元慧)라고 하였다. 선관서(고려 충렬왕
34년(1308)에 대


관서를 고친 이름. 뒤에 다시 대관서,선관서로 고침)령의 벼슬을 지낸 그의 선고(先考)는 서구(瑞具)였고,


모친은 정씨로서 영산군 사람임. 하루는 어머니가 꿈을 황금빛 새 한 마리를 보았는데, 그 새가
어머니에


게로 날아들어 머리를 쪼면서 오색찬란한 알을 품에 떨어뜨리는 꿈을 꾼 후, 이내 태기가 있어
충숙왕(忠


肅王) 7년(1320) 정월 보름날 원혜를 낳았다. 어렸을 때부터 남달리 영민하였고, 특히 한가지 일에
이심을


품으면 그에 관해 골똘히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나 원혜가 20세 되던 해에 그는 동리 친구가 죽는


바람에 출가를 결시하게 되었다. 슬픈 생각을 품고 공덕산(功德山) 묘적암의 요연선사(了然禪師)에 게


서 머리를 삭발했다. 이어 여러 고승(高僧)을 찾아 전전하다가 서천(西天)의 지공과 절서의 평산에게 법을


이어 받아 그 종풍(宗風:그 종파의 풍습. 한 교파의 종문의 풍습)을 크게 드날렸다. 나옹은 원나라
연도(燕


都)에 가서 유학하고 법원사(法源寺)의 지공(指空)과 정자선사(淨慈禪師)의 평산(平山)에게 참학(參學)한


후에 법의(法衣)와 불자를 받고 오랫동안 불법에 힘쓴 바 있다. 원제도 나옹선사를 칭찬하고 격려하여


제선사(廣濟禪師)에 머무르게 하고 금란가사(金蘭袈裟:금으로 난을 두른 가사. 또는 금란으로 만든
가사)


와 불자를 내려 그 법을 크게 빛냈고 평소에도 그의 게송(偈頌)을 사람들에게 많이 보냈다. 나옹선사가


산화상(平山和尙)을 찾아 뵈었을 때 일이다. 평산은 물었다.


"일찌기 어떤 사람을 보았는가?"


"서천(西天)의 지고(指空)을 보았는데, 그는 날마다 천검(千劍)을 썼습니다."


"지공의 천검은 그만두고 그대의 일검(一劍)을 가져오라."


평산의 말이 끝나자, 나옹은 좌복(座伏)하고 있던 방석을 내밀었다. 그 순간 괴이한 일이 일어났다.
솜으


로 만든 방석이 일순간에 몽둥이로 변하여 내려치는 것이다.


"이 도적이 나를 죽인다." 평산은 외쳤다.


"내 검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지만 사람을 살리기도 합니다." 하며 나옹은 쓰러진 평산화상을
일으켰다.


이 후 평산은 설암(雪菴)이 전한 급암의 가사와 불자로 믿음을 표하였다.


나옹은 무술년(戊戌年 1358) 봄 수기(授記:불타의 설법 중에서 문답식 또는 분류적 설명으로 되어 있는


부분. 불타가 그 제자들에게 미래의 중과에 대하여 미리 예언한 교설. 또는 그러한 예언를 해주는 일)를


어 귀국해 곧바로 오대산 상두암(象頭菴)에 은신하였다. 공민왕(恭愍王)이 이름을 듣고 사신(使臣)을 보내


오기를 청하여 만나보고 공경하여 신광사(神光寺)에 머루르게 하였다.


그 후 신광사를 떠나 다시 산협(山峽)이 웅좌하며 수려한 용문산, 원적산, 금강산 등지로 순행한 뒤,
보암


(普巖) 장로가 지공의 유촉(遺囑:살아있을때의 부탁. 죽은 뒤의 일을 부탁함)한 자사 한 벌과 편지 한통을


받아가지고 와서 나옹선사에게 주었다. 나옹은 그것을 입고 향을 사른 뒤
보설하였다.


경술년(庚戌年) 첫 날 아침에 사도달예(司徒達睿)가 지공의 영골 사리를 받들고 회암사(檜巖寺)에
도달했


다. 나옹은 그 영골에 예배하고 산을 나왔다. 임자년(壬子年) 가을 우연히 지공이 가리킨 삼산 양수의
예언


을 생각하고 회암사 북쪽 봉우리에 지공의 영골사리를 봉안한 탑을 세웠다. 그 해 9월 23일에 임금이 돌아


가시니 몸소 빈전(殯殿)에 나아가 소참(小參) 서식을 갖추어 왕사의 인을 조정에 돌렸다. 무왕께서도
즉위


한 후 인보를 내시어 왕사로 봉하셨다. 병진년 봄 회암사의 공사를 마치니 서울 밖의 사중들이 구름같이


모여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마침 대평(臺評)이 생각하기를 회암사(檜巖寺)는 서울과 가까우므로


중의 완래가 끊이지 않으니 혹 폐엄하게 되지나 않을까 염려하여 임금의 명으로 밀양의 형원사(瀅源寺)로


옮기게 되어 나옹의 출발을 재촉하였다. 나옹은 마침 병중에 있어 남녀(藍與)를 타고 삼문(三門)의 남쪽에


있는 물가로 나갔다가 스스로 남녀를 멘 사람들을 시켜 열반문(涅槃門)으로 나왔다. 대증은 의아해
울부짖


었다. "힘쓰고 더욱 힘쓰시오. 나 때문에 중단하지 마시오. 내 걸음은 여흥(驪興)에서 멈출 것이오."
나옹


선사가 말했다. 한강에 이르러 호송관 탁첨에게 "나는 지금 병이 심하여 배를 타고 가고 싶소."하였다.


리하여 배를 타고 산모퉁이를 헤쳐 유유히 흘러가는 물굽이를 거슬러 배떠난지 이레되는 날 여흥의
경승


지 신륵사에 이르게 되었다. 병이 조금 덜하기를 기다리는데 여흥수(驪興守) 황희직(黃希直)과
도안감무


(道安監務) 윤인수(尹仁守)가 탁첨(卓簽)의 명을 받고 출발을 재촉했다. 대자(待者)가 이 사실을 말하자


옹은 말했다. "그것은 어렵지 않다. 나는 마땅히 갈 것이다."하고는 제자들을 불렀다. "노승은 오늘
너희들


을 위해 열반불사(涅槃佛事)를 지어 바치리라." 하고는 조용히 설법(說法)하시고 고요히 입적(入寂)하시니


그 때가 1376년 5월 15일 진시(辰時)다. 스님의 속세(俗歲)는 57세, 법랍(法臘)은 37년 되던
해였다. 나옹


선사가 입적하실 때 여흥 고을 사람들은 찬란한 오색 구름이 봉미산(鳳尾山)을 휘덮는 것을 보았고,
타시


던 흰 말은 3일 전부터 풀을 먹지 않은 채 머리를 떨구고 슬피 울었다는 것이다. 다비를 동대에 모시고


리(舍利)를 수습하는데 구름 한 점 없는 날씨에 사수백보 안에 비가 내리고, 사리는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봉미산 마루에 신광(神光)은 비치고 신륵사의 중 달여(達如)는 꿈에 여룡(驪龍)이
소분대(燒焚臺)


에 서려있다가 강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는데 그 형상이 말과 같았다. 신륵사 봉미산 중턱에
정골사리


(頂骨舍利)를 모시고 그 외 사리를 모셔가려할 때, 가물어 물이 얕음을 걱정하였는데 갑자기 물이 불어


였던 배들이 떠갈 수 있어, 여룡이 왔다는 전설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2003-10-24 09:5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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