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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를 아시나요?
size=5>영화 '실미도'를 보았습니다.
섣달 그믐 날, 꺼~이 꺼~이 목젖이 차 오르는 벅찬 감동으로
눈물을 흘리며
눈이 아닌 가슴으로 영화 '실미도'를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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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번없는
용사로 개 같이 사라져버린 젊은 영혼을 위한 진혼곡인가.
그때 그 날, 필자는 경기도 가평에서 군 복무중 출동했다가
원대복귀 했던
기억이 생생한 숙명적인 야만의 시대가 찡!
size=5>서울이 발칵 뒤집힌 1971년 8월 23일.
인천에서 버스를 탈취, 서울로 진입한 정체불명의 24명의
무장군인!
군 당국은 '북괴 무장공비' 침투라고 긴급 발표!
시민들은 한바탕 전쟁의 공포에
휘말렸고
출동한 군인들과 총격전 끝에 청와대로 향하던 이들은
수류탄 자폭으로 끔찍한 최후를 마쳤는데
사실은 북한 주석궁 침투를
목적으로
비밀리에 지옥훈련을 받은
'684 실미도 특수부대원'으로 밝혀졌지만
실미도 특수부대 난동사건은
진실을 밝힐 기회도 없이
역사 속에 묻혀 버린 지 어언 30여 년!
왜, 이들은 총부리를 청와대로
돌렸는가?
실미도 특수부대 기간요원으로 최후의 생존자는
소대장 김방일씨와 경비병 5명등 6명뿐!
북파 목적의 '실미도 684
특수부대'
68년 4월에 창설되었다고 해서
'684부대' 라고 명명(命名)!
이에 앞서 68년 김신조 등 청와대
습격 목적의
무장공비 31명중 29명이 사살되고 한 명은 자폭하고
유일한 생존자인 김신조가 생포된 1.21 사태가
있었다.
분노에 찬 당시 박정희 대통령!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부대인원도
김신조 특공대와 똑같은
31명의 훈련요원과 31명의 기간요원들로 보복 특수부대 창설
아! 그러나, 중앙정보부의 지휘아래
공군이 훈련을 맡아
3개월의 지옥훈련 끝에 일당백의 실력을 갖췄지만
창설 3년 4개월만에 31명 전원 참혹하게 죽은 아~
실미도!
인천에서 남서쪽 직선 거리 20
km, 해발 80m, 2제곱 km의
사람이 살지 않는 작은 무인도,
중앙정보부가 최적의 장소로 지적한 비극의 섬,
실미도!
"체포되면 죽는다!"
목숨을
바쳐 나라에 충성하고 임무를 완수하면
새 인생의 희망에 부풀었던 사형수 등 밑바닥 인생들!
실전명령만 기다리며 참아 온 석 달.
드디어, 68년 8월에 북한침투 명령이 떨어졌다가 전격 취소된 후
지옥 같은 훈련을 3년이나 견디어 내면서 작전 명령을 기다려
왔건만
단, 한번도 북파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고
끝내는 실미도 난동사건으로 끔찍한 최후를 맞았으니
과연, 누가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다는 말인가?
국제 데탕트로 남북한은 마침내
평화통일안을 천명하고
남북 적십자 회담 등으로 화해의 물꼬가 터지자
더 이상의 존재가치가 없어 애물단지로 전락된
684부대!
마침내, 시시각각 다가오는 '실미도
최후의 날!'
1971년 8월23일 새벽 6시. 탈출 행동개시와 함께
삽시간에 살육의 현장으로 바뀐 아비규환의
실미도!
현재원 24명의 기간요원 중 교육대장
등 12명이 사살되고
6명은 바다로 피하다 익사, 생존자는 경비병 5명과
김방일 소대장 등 총 6명뿐!
낮 12시 30분경 3년 4개월간
갇혀 있던 실미도를 탈출,
인천상륙작전에 성공, 탈취한 시내버스를 타고 서울로 향하다가
가로수에 버스가 받혀 멈춰 섰고 잠시 후,
"꽈~꽝!!!!"
수류탄 자폭, 생존자 4명에게는
사형이 집행되고
사건발생 3일 후 당시 국방장관이 전격 사표를 냄으로써
영원한 미궁으로 사라진 '실미도 사건!'
만들어만 놓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아
3년 4개월이나
버려진 실미도 특수부대!
왜, 그들은 결국, 죽을 수밖에 없었을까?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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