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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암 변이중선생 순례지기행
icon 星原 김 복열
icon 2011-07-03 07:54:23  |  icon 조회: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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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암 변 이중선생 전적지 순례 기행



김 복열




2011.6.23일 새벽부터 잔바람이 불더니 빗방울이 창문을 두들기어 눈을 비비며 새벽잠을 설치었다.


간밤에 장성문협 사무국장 임춘임의 전화“내일 비가오더라도 전적지 순례행사 강행합니다. 는 내용을 기억하면서 괜스레 걱정하면서도 뜻있는 행사에 동참하리라는 마음을 정한 자신의 설래 임에 들떠있었다.


장성문협의 창시자인 김 병효 선생께서 우중에 우산을 쓰고 우리보다 먼저 기다리어 차에 승차하였다.


먼저 변이중선생을 모시는 봉암 서원에 들리었다.


봉암서원은 전남 장성군 장성읍 장안리 19번지에 위치한 지형으로는 노령산맥 줄기로 봉명조양(鳳鳴朝陽)의 형국으로 뒷산의 두리 둥실한 산줄기기가 구름처럼 내려오고 좌우 감아 도는 청룡백호 동화산과 옥녀봉 앞쪽에 근접한 안산에는 소나무가 소반처럼 아름답기도 하며 건너 황룡강이 횡단하여 흐르고 멀리 제봉산이 또 안산으로 바라다 보인다.


사람들이 일컬어 명당이라 하는 서원에 오늘 장성 문협 전남 문협 광주 문협 우리 문인들이 방문하여 선생의 업적을 세기고 얼을 배운다는 게 기쁜 일이 아닌가?


이 장안마을을 장자터라고 부르기도 한다.


백만장자가 살았다고 하여 장자터라고 하는데 선생과 종제인 변 윤중 외에도 종친의 개인 사제를 털어서 화차제작에 협조하여 당시 300량을 만들어 실전에 배치하였다는 사실 그 후 왜적의 보복으로 마을 종친들이 화를 당했다는 설움 실로 구국의 일이란 쉬운 일이 아니고 자신의 개인의 신상은 물런 친족과 이웃의 희생도 감수해야하는 경우가 빈빈하지만 마땅히 가야만 하는 길이여서 그분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묵념을 올린다.


장성에 살아오면서도 선생의 업적에 소홀하여 관심이 없었지만 “소설 변이중” 김 형열 선생의 저서를 읽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였다.


율곡이이선생의 문화생으로 학문을 수학하여 23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라 28세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여 그 후 관직을 두루 맡으셨으며 문관으로 조정에서 정치활동에 역량을 발휘하여 조선시대 절대 왕에게 충신으로써의 소임을 다하여 가문의 명예와 학문을 수련한 문화생의 파별의 정치판도 속에서도 정도의 길을 걸으면서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떳떳하였던 점들 문관이면서도 임란이 발생하자 어느 장수 못지않게 군량미 이며 군수물자 수송 등의 어려운 일을 도맡아 하였으며, 왜군의 조총에 맞서서 싸울 수 있는 화차를 고안하여 제작하였다는 것은 군사병기의 혁명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배운 임란 중 행주산성대첩은 아녀자들의 행주치마에 돌멩이를 주어 날라서 군사들이 돌팔매질로 승리하였다는 상식이다.


고경명 신립 여러 장수들이 조총에 희생당한 상항에서 볼 때 기백으로만 전투에 승리하기에 어렵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우중에 도착한 행주산성의 지형만 보아도 남쪽에 양천 강 (한강) 덕양 산의 강으로 향한 가파른 절벽과 입구의 성 경사도가 완만한 경사 15도 정도의 기울기이며 성의 높이가 높지 않으며 성마루가 50여 평으로 협소하며 주변의 돌멩이 흔적이 없는 정항으로 보아 현재의 행주치마의 역사는 심히 의구심이 많으며 강으로 둘러싸여 배수진을 치고 싸울 수밖에 없는 여건으로 주변의 흙과 나무로 토성과 목책 성 등으로 위장하여 적을 유인하여 화차 40량을 적소에 배치하여 적절한 시간에 불을 붙여 발사함으로 왜적 2만 여명의 조총으로 무장한 정예무대의 신식군대를 섬멸하는 데는 돌멩이가 아니라 화차의 덕이 크다고 말할 수 있으며 당시 권율 장군도 화차의 덕이라 말하였다 한다.


역사적인 사실이 과거의 정치적 사정으로 묻히어 왔지만 이제는 진실 된 방향으로 왜곡된 역사를 수정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라 말하고 싶다.





변 이중선생은 선조대왕의 어명을 받아 전라도 소모어사로 고향에 도착하였다.


전주 감영에 들려 각 고을에 파발을 보내 격문을 붙이고 의병과 군량미 모으도록 하고 의병과 군량미는 의병 청에서 관장토록 하였다.


그때의 격문을 소개하면



“ 백성 여러분 .


소모어사 변이중은 뜻있는 백성에게 고하노라.


거리마다 격양가 드높은 태평성대를 200년이나 누렸음은 모두 성군의 덕화일지니, 천만세를 지난들 어찌 국운을 잊을 손가


불행히도 나라가 왜놈들이 침입하여 강산은 초토되고 백성은 짓밟히고 있으니 참으로 통탄하지 않을 수 없도다.


아! 호남 오십 주군에 어찌 의기가 남아 없으리오. 지사들이여, 모두일어나 의로운 칼을 들어 나라를 구하고 왕은에 보답 할지어다.


우리 임금께서는 지금 평양도 의주에서 한양이 수복되기를 기다리고 계신즉 우리 모두 나서서 왜적을 쳐부수자.”



임난 당시의 나라의 위급한 사항이 잘 표출된 격문이기도하다.



우중에도 차는 강화대교를 자나 용두돈대가 있는 광성보에 도착하였다.


강화도는 역사적으로 크고 작은 사건이 많은 유적지와 나라의 비운의 운명들이 많지 않았나 생각된다.


한강과 임진강 서해의 해상과 서울과 경기의 관문으로 삼국시대에는 한강 쟁탈전 고려시대의 몽고의 잦은 침입 삼별초의 항몽에 대한 저항 팔만대장경의 조판 등등 이조시대는 문호를 개방하면서의 외세와의 마찰 프랑스와의 병인양요 미국과의 신미양요 강하도 조약 등의 역사적 파란을 격은 민족 설운 애환이 담긴 지역이기도 한 곳이다.



변이중 선생의 강하도 교동에서 지은 작품을 소개하면





喬桐遇雨(교동우우) -교동에서 비를 만남




久雨令人苦(구우령인고)-비가 오래 내리어 사람이 괴롭다


孤城漲百川(고성창백천)-외로운 성에는 많은 냇물이 불어났네.


急流疑裂地(급류의열지)-급히 흐르는 물은 땅을 찢어 놓을 듯


高浪勢滔天(고랑세잠천)-높은 물결기세는 하늘에 닿을 듯


却恐崩山塚(각공붕산총)-산의 무덤들이 무너질까 두렵고


還愁沒浦畓(환수몰포답)-갯가의 논들이 잠길까 걱정이네


平生未曾見(평생미증견)-평생 이런 일 보지도 못했는데


災咎在誰邊(재구재수변)-재앙과 허물이 누구에게 있는가






비 내리는 행주산성



김 복열




비가 오누나


소악루에 올라서니


교동에 내린 비가 주룩 주룩


안개 덮인 행주산성



속절없이 흐르는 한강물아


행주대첩 아느냐



행주산성만은 기억하리라


목책 성 목책도가니 성 화차 승자통기 총 통기 신기전기


그 날 승리의 함성을





흐르는 한강물은 그날의 함성을 전설로 들려주지만 산성의 흙과 지형은 역사의 흔적으로 생생히 기억하리라 믿으면서 강서구의 소악루에서 바라보는 우천중의 전경 가양대교 행주대교 성산대교 등등이 바람과 빗방울에 흔들거리었다.


국란의 비극을 슬기롭게 극복하신 선생의 얼을 세기는 역사적인 날 이였다.







2011-07-03 07:5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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