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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암望庵 선생 스페셜 인터뷰
icon 소천재선
icon 2011-07-21 17:02:36  |  icon 조회: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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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암望庵 선생 스페셜 인터뷰




이순신 장군이 말했다.


‘약무호남 시무국가 若無湖南 是無國家’


즉 ‘만일 호남이 없었다면 나라가 없었을 것이다’고.




“아니야 아니야 행주치마가 아니야!”


‘약무망암변이중 若無望庵邊以中 시무행주대첩승 是無幸州大捷勝’


즉 ‘만일 망암 변이중이 없었다면 행주대첩의 승리도 없었을 것이다.’




청천벽력!


때는 바야흐로 지금부터 400 여 년 전인 1592년 선조25년 임진년 4월 13일


“명나라를 치러 가는 길을 비켜라!”는 가도정명假道征明의 도요데미히데요시


왜군의 부산포 점령으로 시작된 섬나라 일본과의 피비린내 나는 7년 전쟁이 있었으니


역사는 이를 ‘임진왜란’이라 부르니 맑은 하늘에 벼락 치는 청천벽력靑天霹靂!




속수무책!


신식 조총으로 무장한 파죽지세의 일본군에


구식 활로 대항하는 조선군은 백전백퇴白戰白退


해전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이 무너지고


육전에서 최후의 방어선인 탄금대에 배수진을 친 신립장군이 무너지니


아, 중과부족이로구나. 속수무책!




삼십육계!


“전하 이 나라 이 백성을 버리고 어디로 가시나이까?”


급기야 선조대왕은 4월 30일을 기하여 한양을 버리고 몽진蒙塵길에 오르고


성난 백성들은 경복궁에 불을 지르는 등 아비규환의 아수라장속에


전쟁발발 한 달도 채 못 된 5월 3일에 한양마저 함락되고


곧이어 6월 15일에는 평양성까지 함락되고 말았으니.... “SOS~! 헬프 미 명나라”




한산도 대첩!


“학익진鶴翼陣을 펴라!”


“둥둥둥~”` 드디어 반격의 진군 북소리가 들리고.~


초토화된 절망의 조선강토에 하느님이 보우하사 1592년 7월에 이르러


세계 4대 해전중 하나로 회자되는 ‘한산도 대첩’으로


청사에 길이 빛나는 영웅이 탄생하였으니 그 이름 충무공 이순신!




진주 대첩!


1592년 10월, 진주목사 김시민의 조선군 3,800명이 3만 왜군을 격퇴하자


1593년 6월, 3만7천명으로 공격한 설욕전에서 왜군을 끝까지 분쇄하였으나


끝내 진주성은 함락되어 6만 명이 학살당한 임진왜란 최대의 격전으로써




‘강낭콩 보다 더 붉은’촉석루 진주 남강에서


왜장을 껴안고 몸을 던진 논개의 충절과


비록 성은 빼앗겼지만 치명타를 주어


대첩 반열에 오른‘진주대첩’의 영웅들이여!




행주 대첩!


1593년 2월, 권율 장군의2,300명의 조선군이


부녀자들이 행주치마에 담아 온 돌로 조총을 쏘아대며 개미떼같이 올라오는


3만 왜군을 쳐 부셨다는 믿을 수 없는 ‘행주대첩’의 비밀은 과연 무엇일까?


싯크릿 행주대첩의 숨은 주인공 망암 변이중!


오늘 그 분과의 400 여년 만에 설레는 인텨뷰!




“망암 선생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화차를 만들어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끄신


선생님의 호국정신과 업적을 기리고자 2011년 6월23일(목)을 기하여


‘망암 선생 서거 400주년 기념행사 추진위원회(위원장 변온섭)’주관으로


‘행주산성 역사탐방’길에 함께 한 저희 장성문협과 광주문협 문인들께


당시 상황을 말씀해 주시지요.”




“세상을 떠나온 지 400년 만에 여러분을 만났으니 나는 더 반갑소!


더구나 ‘망암 선생은 충·효·학을 두루 겸비하고
위기로부터 나라를 구한 위대한 선비’라며
'올 추모사업을 통해 선생의 업적과 사상을 재조명하고,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자원이 되길 기대한다.’는 김양수 장성군수의 추모사에 고맙다고 전해 주시오.




선조대왕 의주 몽진 때 백성들의 눈물인 양 비가 억수로 쏟아졌는데


오늘도 그때처럼 억수로 쏟아지는 빗속에 기왕 예까지 찾아왔으니


옛날 옛적 옛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나눠봅시다.




나는 1546년 장성읍 장안리에서 태어나


우계 성혼과 율곡 이이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23세 때 사마시에 합격해 성균관생원이 되고,
28세에 문과에 급제한 후 사헌부 감찰, 성균관 전적, 황해도 도사 등을 역임했고


1592년 임진년에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그 해 10월 왕명으로
전라도 소모사(召募使)가 돼
군량미와 의병 모집을 담당했고




함안군수를 끝으로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 장성에 돌아와
하곡 정운용, 추담 김우급 등과
교유하며 요즘의 ‘바르게살기운동’이랄까
장성향헌 20조를 만들어
백성 교화에 힘쓰다가 1611년 67세에 죽었는데
그 후 이조참판에 추증되어
숙종 23년(1697년)에 건립된
봉암서원(별유사 변동혁)의 주향과




행주대첩을 이끈 권율 장군을 주향으로 모신 행주서원에도 배향됐는데


그 사연인 즉 이순신의 거북선’ ‘이장손의 비격진천뢰’와 더불어


임진왜란 시 3대 발명품의 하나인 곧 내가 만든 ‘망암의 화차’로써


달구지 4면의 40개 총구에서 승자총통 40발을 연달아 쏠 수 있는 최첨단


다발 로켓포 신무기를 사촌 동생인 변윤중과 함께 그때 개발한거야.




왜군의 신식 조총은 조선군의 활보다 5배, 창보다 10배나 강했는데


그에 맞설 화차 300량을 만들어 그중 40량을 행주산성 권율 장군에게 보낸 것이


행주대첩의 결정적 승리요인이 되었고 내 ‘망암집’에 ‘화차도설’을 비롯하여


18가지의 병기 제조법을 그림으로 상세히 설명해 놓았지.




아무튼 3만 왜군을 무찌른 1593년 2월 12일 ‘행주대첩’의 혁혁한 전과는


조선군 화차의 힘이라고 ‘행주대첩지’에 기록된 바와 같고


부모님 작고 후 나는 초하루와 보름이면 묘소를 바라보며 절절한 그리움에 절하고


작은 초막을 짓고 통곡하였더니 자연스레 호가 망암望庵이 되었다네.”




“옛 이야기를 망암 선생님께 직접 들으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끝으로 한 말 씀 더 해주신 다면요?”


“조선 아니 대한민국은 지정학적으로 세계 4대 최강국에 둘러싸인 금싸라기 터로


한반도에 어떻게든지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몸부림치는 ‘일본, 러시아, 미국, 중국’과


좋거나 싫거나 숙명적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할 운명 속에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정신만이 살길 이니라.”




‘행주산성 역사탐방’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도
비는 계속 억수로 쏟아지고 있었지만


선조대왕의 비극적인 몽진행차가 아닌
‘약무호남’망암 선생님의 고향 장성을 향하여 GO!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벙긋~ 아리~ 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2011-07-21 17:0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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