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 사기의 저자 김영수 박사와의 만남
‘책과 함께 생활속의 열린 문화 공간’을 지향하는 장성공공도서관(관장 김원경)에서
2014 상반기 ‘사유와 성찰이 있는 인문학 학당’3월 12일부 7월 30일까지
매주 수요일 오후 7시~9시까지 총 20회 ‘사마천 사기’의 저자 역사학자 김영수 박사의
강의로 진행되고 있는 바훌륭한 강연을 준비해 주신 장성공공도서관이 정말 고맙다.
사마천 사기(史記)만 28년간 연구하신 대단한 집념의 대학자 김영수 박사의 강연요약
1. 왜 지금 사마천과 「사기」인가?
1) 내부적으로 절실하게 다가온 중국이란 존재감을 「사기」를 통해 인식하게 된다.
2) 외부적으로 중국의 파워, 특히 소프트파워(경제, 문화 등)에 대한 경각심을 가져야 할 필요성이
절박해지고 있다.
3) 내외적으로 중국의 역사 왜곡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될 것으로 예상된다.
4) 미국식 처세와 자기계발 및 리더십의 한계에 부딪쳤다.(911 이후 특히 두드러짐)
5) 정치 경제적으로 불안한 상황에서 자기성찰의 필요성이 강하게 대두되고 있다.
6) 이런 점에서 문사철을 통섭한 「사기」는 새롭고 차원 높은 가치관 정립에 큰 도움을 줄 것이다.
7) 체제와 내용의 완벽한 결합체인 「사기」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사마천의 인생 역정을 통해
시대의 좌표와 멘토를 동시에 얻는다.
2. 사마천의 간략한 생애
사마천은 한나라 조정에서 태사령(太史嶺)이란 벼슬에 있던 사마담의 아들로, 기원전 145년에 태어나 기원전 90년까지 56세를 살고 세상을 떠났다.
그가 활약한 시대는 한나라의 전성기였던 무제 때였다.
어려서부터 고전을 공부했고, 스무 살에 아버지 사마담의 권유로 견문을 넓히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사마천은 38세 때인 기원전 108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3년 만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사관이 되어 역사서를 편찬하는 일에 사마천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 받았음은 물론, 아버지의 사상과 관념으로부터 영향을 깊게 받았다.
아버지 사마담은 천문과 역학은 물론 도가(道家)까지 두루 섭렵한 뛰어난 학자로 태사령이란 벼슬에 있었다. 생전에 사서를 편찬하다가 완성하지 못하고 아들 사마천에게 물려주었다.
스무 살 젊어서부터 사마천은 아버지의 권유로 전국을 답사했고, 벼슬살이를 시작한 후에도 무제를 수행하여 전국을 돌아다녔다.이러한 현장 경험은 「사기」를 쓰는데 막대한 도움이 되었다.
초(楚) 나라의 애국 시인 굴원이 자살한 멱라수를 찾아 애도를 표시했으며, 한신/소하 등 한나라를 세운 공신들의 고향을 찾아서는 알려지지 않은 그들의 과거 이야기를 채집했다.
이 자료들은 「사기」 곳곳에 수록되어 「사기」의 내용을 더욱 실감나게 만들고 있다.
현장답사와 문헌기록을 변증법적으로 소화해낸 「사기」의 실증적 정신은 오늘날 역사가들이 본받아야 할 큰 장점이다.
태사령에 임명된 지 10년째 되던 기원전 99년, 47세가 되던 그 해 뜻밖의 사건으로 사마천의 인생은 중대한 전환을 맞이한다. 이른바 '이릉 변호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였던 명장 이광의 손자로 흉노 토벌에 및나는 공을 세웠던 이릉이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어쩔 수 없이 흉노에 항복하자 조정 대신들은 일제히 이릉을 성토하고 나섰다.
불과 얼마 전 이릉의 승리에 환호하던 자들이 하루아침에 안면을 바꾼 것이다.
사마천은 있는 힘을 다해 이릉을 변호했다.
그러나 이것이 되려 무제의 불편한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 화가 난 무제의 불편한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던 것이다. 화가 난 무제는 사마천을 옥에 가두었다. 사마천은 이릉과 친한 사이도 아니었다.
다만 이릉이 전쟁에서 승리할 때는 모두들 칭찬을 아끼지 않다가, 흉노의 포로가 되자 무제와 실권자의 비위를 맞추려고 입을 모아 이릉을 비난하는 조정 대신들의 행태가 못마땅했을 뿐이다.
이릉이 흉노에서 벼슬까지 받자 사태는 사마천에게 더욱 나쁘게 흘렀다.
사마천은 사형 판결을 받았다. 50만 전을 내면 사형을 면할 수 있었으나 아무도 사마천을 구하려 하지 않았고, 사마천은 말할 수 없는 치욕을 감수하며 궁형(宫刑)을 자청하여 석방되었다.
그는 「사기」를 완성하기 위해 사형보다 더 치욕적인 형벌을 자청했던 것이다.
침구 임안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마천은,
"모진 치욕을 당하기로는 궁형보다 더한 것이 없소이다...... 내가 화를 누르고 울분을 삼키며 옥에 갇힌 까닭은 차마 다하지 못한 말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서였소." 라고 고백했다.
치욕스러운 형벌을 받은 사마천은 "이것은 나의 죄로다. 이것은 나의 죄로다! 아무 쓸모없는 불구의 몸이 되었구나" 라며 자책하기도 했지만, 그의 마음은 울분으로 가득찼다.
그는 그 울분을 「사기」를 저술하는데 쏟았다. 「사기」를 완성한 이후 사마천의 행적은 수수께끼에 싸여 있고 그의 죽음 또한 미스터리다. 이 대문에 학계에서는 자연사를 비롯하여 처형, 자살, 행방불명 등 여러 설이 나왔지만 아직 정설은 없다.
3. 절대 역사서 「사기」
「사기」 는 130권으로 이루어진 3천 년 통사이자 중국 역사서 중 최초의 통사이다.
「사기」는 또 2천 년 동안 역대 정권들이 편찬한 이른바 '정사(正史, 관찬사서)' 24사(또는 25사)의 효시로서 정사의 모범이다.
「사기」는 단순히 자료와 책 더미에서 나온 역사책이 아니다. 사마천의 뛰어난 학식에 역사 현장에 대한 치밀한 탐방이 더해진 입체적 역사서이다. 말하자면 사마천의 현장정신이 역사서 곳곳에 스며들어 있어 역사를 보다 생동감 넘치게 접할 수 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