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의병장 이사유 선생 공적 기려

고유제 및 서당터(영학당)표석 제막식 행사

2010-11-10     반정모 기자

호남 의병장으로 대단한 활약을 펼쳤던 이사유 선생(1856~1922)을 기리는 기념행사가 지난 8일 열렸다.

이날 김양수 장성군수, 최병두 호남의병장 이사유선생 기념사업회장, 서영훈 前 적십자 총재, 김한종 도의원 및 기관단체장, 주민, 문중 관계자 등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삼계면 자초리에서 고유제 및 서당터(영학당)표석 제막식을 가졌다.

호남의병장 이사유선생 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열린 이날 행사는 선생이 평소 후학을 양성하고 구한말 일제의 국권침탈에 맞서 민족의식을 일깨웠던 이 곳의 역사적 가치를 후손에 알리고, 그 위업을 계승하기 위해 추진하게 됐다.

기념사업회는 현재 보훈청에 이사유 선생을 독립유공자로의 서훈을 신청한 상태로 당시 영학당 등을 복원, 이곳 일대를 의병사적지로 개발을 추진하는 한편 후손들을 위한 역사교육의 장으로 제공할 계획이다.
김양수 장성군수는 축사에서 "유서 깊은 역사적인 장소가 장성군에 있다는 것을 뜻 깊게 생각한다“며, ”오늘은 작은 표지석을 세우지만 향후 영학당 서당을 복원․개발해 후손들에게 역사적인 교육의 장이 되도록 적극 협조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의병장 이사유 선생은 현 삼계면 수산리 자초마을에서 태어나 부친 이문발(통정대부 추증)의 가학(家學)을 이어받아 서당을 열고 인근 마을의 양반유생인 기우만, 기삼연 등과 깊이 교유하며 신사척사운동에 참여했다.

또 1898년 흥덕 농민항쟁을 주도한 족질(族姪)인 이화삼(李化三:1990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영학회장(英學會長)과 영학당 운동에 참여해 의병활동을 계속했으며, 이후 그의 의병활동에는 “영학당”이란 명칭이 따라붙었다.

이때 이사유 선생은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서(독립기념관 보관)를 통해 나라의 위급함을 알리고 의병 활동의 정당성을 만 천하에 포고 했으며 의병활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해 줄 것을 호소했다.

1906년 화순에서 쌍산의소(雙山義所)가 성립되자 선생은 이화삼 등과 함께 제자를 중심으로 250여명의 의병을 모아 이대극 의병과 합류해 활동하다가 기삼연이 호남창의회맹소를 세우자 여기에 합세해 연합의진을 구성했다.

선생은 또 고종황제 퇴위와 정미7조약에 이은 군대해산등 망국사태가 이어지자 1908년 이백래를 중심으로 재봉기해 유격도장(遊擊都長)으로 활동했으며 이후 분진 할 때 6로군 대장을 맡아 장성, 고창, 담양 등지에서 벌인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 후 순종황제의 의병해산령이 내려진 뒤 선생은 의병을 해산하고 홀로 고성산 토굴을 전전하며 은신하다 1909년 11월에 체포됐다 1년 만에 출옥했으나 고문과 사창전투에서 입은 총상 후유증으로 1922년 6월에 타계했다.